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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노트/2022 봄학기

[공간디자인 컨셉스터디] Lauszló Moholy-Nag, 『The new vision and abstract of artist』읽기

1. 라슬로 모호 이너지

라슬로 모호 이너지(혹은 모홀리 나기, Lauszló Moholy-Nag, 1885 ~ 1946)은 독일의 바우하우스의 인물들 중 발터 그로피우스와 더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말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미국에 전하였다고 한다. 원래 알고있던 사람이라 딱히 새로운 감흥은 없었는데,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위키백과에 나와있는 평을 따오자면,

 "그는 새로운 소재에 대하여 끝없는 욕망을 일으켜, 타블로 회화에 만족하지 않고 금속을 사용한 조형적인 실험을 시도하는가 하면, 그 성과를 새로운 사진의 수법과 결합하여 선전미술과 인쇄에 응용하는 등, 장르를 초월하여 새로운 표현 영역을 확대하였다. 평면 및 입체의 기하학·역학·광학 등 그의 탐구는 4차원의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화가라든가 조각가라는 종래의 개념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라, 미술의 모든 장르에 창조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조형가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D%99%80%EB%A6%AC_%EB%82%98%EA%B8%B0

 

모홀리 나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이 분 글도 좋은 것 같아서 가져왔다. 

https://www.ulsanpress.net/news/articleView.html?idxno=308709 

 

시대를 앞서 미술과 디자인을 겸업한 작가-라슬로 모호이너지 - 울산신문

디자인을 '독일은 과학, 이태리는 미술, 스칸디나비아는 공예, 미국은 비즈니스'로 받아들인다는 통설은 이들 국가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리 틀리지 않은 표현인 듯하다. 이런 표현에 디자인과

www.ulsanpress.net

 

 

 

2. <The new vision and abstract of artist, Lauszló Moholy-Nag, George Wittenborn, 1947> 읽기 

공간디자인 컨셉스터디 수업 과제로, 그가 쓴 <The new vision and abstract of artist, 1947>에서 공간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다. pp.56 - 64. 

<The new vision and abstract of artist, George Wittenborn, 1947>

**아래는 필자가 번역한 내용입니다. 

모든 문화 시대는 공간에 관해 당대만의 개념이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 "공간"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은, 실재로서 이해하는 것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mathematical, isotropic, physical, topographic, geometric, projective, Euclidian, non-euclidian, metric, homogeneous, architectural, absolute, dance, relative, fictive, pictorial, scenic, abstract, spherical, actual, crystalline, imaginary, cubic, finite, hyperbolic, infinite, parabolic, limitless, elliptical, universal, bodily, etheric, surface, inner, outer, linear, one-dimensional, two-dimensional, three-dimensional, n-dimensional, vacuum, hollow, movement, formal, etc... 모두 space에 포함된는 개념들이다. 이런 뜬금한 나열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우리는 공간이라는 것은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간 경험은 타고난 건축가의 특권이 아니라, 모두의 생물학적 기능이다. 공간 경험의 생물학적 기반은 모두의 자질이다. 연습과 적절한 경험을 통해 이 능력은 발전할 수 있다. "공간은 육체의 위치들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공간의 창조는 육체의 위치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부피를 분석하면서, 우리는 신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공간은 vision에 의해 최초로 지각된다. 신체의 가시적 관계에 대한 경험은 움직임으로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공간은 움직임에 의해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있고, 더 높은 단계에서, 춤에 의해 경험된다. 춤은 공간-창조의 충동을 현실화하기 위한 기본적 수단이다. 그것은 공간을 명확히 하고, 서열화한다. 보드빌, 서커스, 무대, 극장과 라이트 디스플레이는 공간 형성과 같은 규칙이 될 수 있다. 

인간은 공간을 다음의 방식으로 지각한다: 

1. 보는 감각을 통해

2. 듣는 감각을 통해

3. 균형 감각을 통해 - 원, 곡선, 굴곡(나선형의 계단) 

4. 움직임의 방법을 통해 - 공간의 다른 방향들에 의해(수평, 수직, 대각); 교차; 점프 등등.

파사드의 개념은 이미 건축에서 제거되었다. 건물의 공간에서, 기능적 사용이 채택되지 않은 곳은 남아있지 않다.  발코니, 전자 광고 사인, 루프가든 등의 활용은 계속된다. 

'공간의 섹션'은 마치 공간이 나눌 수 있는 조밀한 대상인 것처럼 스트립, 와이어 및 유리의 네트워크에 의해 '우주적' 공간에서 잘린다. 90년대 이후의 원양 정기선은 현대 건축의 선구자이다. 근대 건축가들이 그러했든, 선박 제조 엔지니어들은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고, 최소한의 무게로 안정성을 완성했다. 

건축의 경험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 다른 영역에서 처럼, 본질적 내용인 명확한 공간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양식적인 특징을 본다: 도리슨식 기둥, 코린트식 수도, 로마네스크식 아치, 고딕식 장미창 등등. 이런 것들은 물론 특정한 공간 구축의 양식이 될 수 있지만 공간 형성 그 자체의 퀄리티에 대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것은 '교육된' 사람이 건축적 작품을 진정한 공간의 표현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다./ 전통 교육이 책임이 있는 /  

실제 공간 창조, 균형에서 느껴지는 긴장되는 힘의 균형, 공간 에너지의 출렁이는 상호 침투, 에서 느끼는 quality는 그의 인지를 벗어난다.

우리 시대의 증상은, 건축의 본질을 shelter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건축가들에 사이에서, 구분discrimination의 결핍이 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근대' 건축가들이 혁명적 건축물을 오직 양식적 특징만 가져올 때 발생하는데, 예를 들어 '입체파cubist' 외관의 몰이해 등이 있다. 그들의 시작점은 실용적 해결책의 한 종류로 방들을 배열하는 것이나, 구분되는 공간의 관계는, 경험의 차원에서 절대 진정 건축물이 아니다.

모든 건축들은 - 그리고 모든 기능적 부분, 공간적인 구분 뿐 아니라 - 은 전체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빌딩들은 빈 껍데기로 함께 모여있는 것이 되고, 그저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하지만 명확한 공간의 흥분되는 경험은 불러일으킬 수 없다. 

실용적인 응용. 건물들의 필수적인 요소들이 그들의 기능을 다 할때 그들은 진정 공간이 되고, 공간적 경험을 초월하게 된다. 각자의 기능 - 교통, 이동과 시작 요소들, 음향, 빛, 그리고 균형-이 그들의 공간의 관계에서 꾸준한 균형으로 인식될 때, 우리는 비로소 건축이 공간적 창조spatial creation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건축은 사회적, 경제적, 위생적 문제에 더하여, 더 큰 책임이 있다. 예컨대 미리 생각되어야 할 것은, 구조와 사회 경제, 기술과 효율성이 진지하게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목적을 위한 기능들의 조합을 뛰어넘는 진정한 건축적 개념은 논의 되지 않고, 유명하지 않고, 공간을 창조해내지 않는데, 어쩌면 아주 소수에게 그 요소들이 접근 가능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거지는 단순히 가격, 공사 기간, 재료, 구조, 경제에 기반해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간의 경험이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 중간 소감:  라슬로 모호 이너지는 모더니스트로서 기능주의를 전제하고 있으나 거기에 플러스 알파를 자꾸 원하는 느낌이다. 

건축은 단지 복잡한 내부 공간, 혹은 추위나 더위를 피한 쉘터, 고정된 닫힌 공간, 불변한 방들의 배열이 아니라 삶의 유기적 요소, 공간 경험의 숙달된 경험에서의 창조여야할 것이다. 

유기체와 인공체간의, 열린 것과 닫힌 것과의, 도시와 국가 간의 충돌을 제거하는 것이 새로운 건축의 가장 높은 층위로 불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무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 왜냐하면 주안점이 여전히 단일한 하나의 주택에 가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건축 개념은 단일한 유닛을 넘어서서, 그룹, 마을, 지역과 국가를 고려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전체를 말이다.

이 상황을 위한 수단은 많은 것들이다; 확실히 우리는 언젠가 창조된 공간에서 이 기초적인 주장에 도달할 것이다. 건축가를 위한 기준은 더이상 개인을 위한 특정한 주거지의 요구나 경제적 영향에의 공언이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만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general plan 주의를 회전할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근간이 설립되고 나면, 변화들이 생겨날 것이고, 개인들의 필요에 의해 정당화 될 것이다. 

건축의 뿌리는 공간의 문제의 숙달에 있고; 그것의 실용적 발전은 기술적 진보에 있다. 

건축과 조각의 경계. 비록 건축과 조각은 분리된 영역들이지만, 때때로 공간space의 treatment는 체적volume의 treatment와 혼동된다. 다시 말해서: 훈련되지 않은 눈에는, 조각이 건축으로 보이기도 하고, 건축의 작업이 확대된 조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 예컨대 에펠타워. 에펠타워는 건축과 조각의 경계에 있다. 이 책의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볼륨을 형성하는 조각의 일부이다. 그것은 완전히 뚫려있는 '블록'이다.) 후자는 거의 항상 전통 건축의 경우인데, 매스와 바디(볼륨)의 조정이 우세한 곳들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공간 창조는 건축의 의미를 바꾸어버렸다. 간략한 설명하면, 만약 volume의 측벽들이(예를 들어, 명백히 둘러싸인 body) 들이 다른 방향, 공간적 패턴 혹은 공간적 관계들로 흩뿌려져 있으면, 공간적 패턴과 공간 관계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실은 근대와 가짜-근대 건축을 판단하는 최고의 기준이다. 후자는 오직 볼륨의 구분만을 보여주는데, 근대 건축의 깊은 공간 분절과 구분된다 - 예를 들면 planes와 slabs 의 관계 - 

유추 : 키네틱 조각의 존재는 조건이 환경이 정적인 부피가 자리잡은 결과물이 아니라,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들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 "물질이 에너지이다"라는 말은 mass가 아닌 relation을 강조하며, 건축에서 중요해질 것이다. 

>> space의 형성은 static volume의 결과가 아니며, 여러 힘들에 의해서(에너지, relationship 등) 구성된다. 

Static의 대안: Kinetic. 오늘날 우리가 키네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적다. 우리가 사용하는 건축 재료들은 비범한 퍼포먼스를 가능케 하지만 운동 공간 형성kidetic space creation의 '환상적인' 아이디어에는 거의 도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복해온 것은 기술적인 형태들이 다른 영역에서 나타나는, 밀접한 접촉에 있다. 이전 시대의 계층적 고정인 static과는 대비되는, 공통분모는 역동성(운동성)의 개념이다. 

이전에 건축가는 가시적이고 측정 가능하며 균형이 잘 잡힌 건물을 건축하며 그것들을 "공간의 창조"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공간적 경험은 내부와 외부, 위와 아래의 동시 침투이며, 내부와 외부의 소통에서, 힘들의 보이지 않는 활동과 공간 내에서 그들의 관계들이 재료에 존재한다. 


>>> 이제 공간의 창조는 가시적이고 측정 가능한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공간의 경험은 그렇게 정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힘과 위와 아래, 혹은 내부와 외부의 끊임없는 교류로 가능한 kinetic이기 때문이다. 라슬로 모호 이너지는 relation과 kinetic이라는 개념으로 공간을 설명한다. 

공간의 형성은 주로 건축 자재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공간 창조는 무거운 건물 덩어리의 합성물도, 속이 빈 몸체의 형성도, 잘 배열된 볼륨의 상대적 위치도 아니다. 또한 하나의 cell들이 서로 배열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공간 형성은 엇갈림interweaving이다. 즉, 힘들의 요동치는 활동으로서 모든 방향으로 확장하는, 고정된 공간의 부분들의 추적 가능한 관계이다. 

>>> 공간을 형성하는 것은(Space creation)은 요동치는 힘들의 활동... 그것들의 위빙이다. 

이 공간은 몸체의 제한으로 인해 측정 가능한 평면의 영향을 받으며, 측정불가능한 힘들의 다양한 영역에 의해 영향받기도 한다. 공간의 형성은 건축 재료가 아니라, 공간적 실재들의 유대가 된다. 

건축 재료는 보조자이다; 지금까지 공간 형성 관계들의 매개로써 사용되었을 뿐이다. 창조의 주요한 수단들은 공간 그자체이며, 그 조건 하에 treatment치료가 진행되어야 한다. 

역사적 순서 : 공간적 치료spatial treatment의 발전의 역사적 순서는 조각에서의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여기는 스케치 정도로만 제시될 것이다. 세부적인 느낌, 적절한 예시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이것만으로도 건축적 발전이 volume에서 open space의 관계들로 발전해왔다는 관념을 마음속에 새기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1. 단일한 셀; 닫힌 (빈) 몸체들. 

2. 단일한 셀; 한 면이 열린. 

3. 노출된 구조의 등장; 기둥stilts, 기둥columns

4. 몇몇 셀들이 평면으로 확장되고, 이후에 수직으로 확장; 닫힌, 컴팩트 블록

5. 셀들의 상호 침투; 아치, 볼트vault-둥근천장, 큐폴라cupola-둥근지붕; 수직성. 

6. 모든 면의 천공; 수평적인 요동(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7. 동일하게, 수직방향으로 열림; 천공은 옆으로 발생할 뿐 아니라 위 아래로도 발생한다. 예컨대 선교ship's bridge; 그로피우스Gropius, 꼬르뷔지에Corbusier, 오우트Oud, 미스 반 데어 로에Mis van der Rohe, 그리고 어린 건축가들의 작업 

8. 상단의 평면도와 하단의 평면도가 다르다; 공간 셀들은 천장에 매달려있다. 

 

무대와 영화 내에서의 공간 창조 : 댄스, 운동, 곡예를 제외하고, 인간의 표현 형태 -회화, 조각, 음악, 시와 같은- 로서의 공간 창조는 의식적인 출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내적 충동에서 파생된 개념은 정당하다고 인정되며, 서커스, 보드빌, 극장과 영화, 그리고 가끔 열리는 박람회 건물에는, 이러한 공간적 창작 활동을 건축 외의 영역에서 실현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다. 그들을 통해서 해방의 새로운 길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들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중요할 듯 하다. 그들은 또한 실용주의 건축가들에게 도움을 주며, 일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실용의 건축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 서커스 보드빌, 박람회 등의 무대와 영화 내에서의 공간 창조는 우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이끌 수 있으므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감각적 반응을 통한, 혹은 심지어 공간 인지를 통한 공간적 가치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비슷한 진술이 색상의 영역에서 괴테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진술은 오늘날 거의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언어는 정확한 의미와 감각적 경험의 영역의 풍부한 변주들을 형성하는데 부족하다.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 공간 창조의 문제에서 이론적 접근이 무모한 것으로 낙인찍힐 필요는 없다. 

>>> 우리의 감각을 통한 공간적 가치는 너무나 풍부하기 때문에,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될 수 없다. 

생물학적 순수함과 단순함이 가이드로 여겨진다. 공간 창조의 가장 초기적인 단계는, 명백하게 생물학적 입지에서 그것의 중요성이다. 실제적인 평가에서 공간은 "조각적" 외관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서의 창조적 표현 계획에 필요한 생물학적 조건을 설정하는 관계와 관련이 있다. 건축에서는 조형적 패턴이 아니라 공간적 관계가 건물의 요소이기 때문에 건물 내부는 서로 연결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 공간 분할을 통해 외부와 연결된다.

그 업무는 단일한 structure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음 단계는 모든 방향에서의 공간 창조와, 계속되는 공간 창조이다. 

경계는 유체가 되어, 공간은 흐르는 것으로 인식된다 - 관계들의 셀 수 없는 연속으로. 

이런 측면에서 비행은 중요한 부분이 있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새로운 관점, 비행기에서 올려다보는 관점이 등장하게 된다. 필수적인 것은 조감도이며, 더 완벽한 공간적 경험이다. 비행은 건축적 관계의 이전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인공적 빛과 자연적 빛의 새로운 활용 역시 비슷한 것으로 논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무에 둘러싸인 대형 유리로 된 흰 집은, 빛이 들어올 때 거의 투명해진다. 흰 벽들은 그림자들이 나무들을 증폭하는 투영 화면으로 작용하는데, 유리 판은 나무가 반복되는 유리가 된다. 완벽한 투명성이 그 결과이다; 집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인공 빛의 활용은 그러한 영향들을 증대시킬 수 있다. 밤에 강한 빛은 디테일을 파괴하고, 균형을 집어삼키고, -이 목적으로 우리의 관점을 이용한다면- 파사드가 아닌 공간의 관계들을 보여준다. 

심지어 더 제한된 공업 빌딩들과 거주지들의 공간 창조는 유사한 진전들을 만들어낸다. 

미래 건축의 경로는 다른 시작점에 의해 설명된다: 내부와 외부, 위와 아래가 하나로 통합하는. 

>>> 결국 마지막 말이 저자의 주장. static volume이 아닌 kinetic. single cell이 아닌 관계들, 경계의 흐려짐, 공간이 흐름으로 인식되는, 내부와 외부 혹은 위 아래가 혼합되어 하나 되는 것이, 미래의 건축이다. 

 

 

 

3. 읽고나서 - 조감도는 과연 완전한 공감적 경험의 방식인가

라슬로 모호 이너지는 이 글에서 공간이 진정한 창조는 무엇을 통해 가능한지 고찰하며, 미래의 건축은 unit에서 relation으로, static에서 kinetic으로, 내부와 외부의 혼합, 상부와 하부의 혼합을 통해 경계가 흐려지며 공간이 흐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대체로 동의하며 읽던 와중에 의문점이 생긴 부분이 있다.

(...) The essential is the bird’s-eye view, which is a more complete space experience. It alters the previous conception of architectural relations. - 해당 페이퍼 p.63.

그는 비행은 건축적 관계들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하며, 조감도bird’s-eye view는 더 완전한 공감적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이 글이 쓰여진지 반 세기가 넘게 지난 현재, 과연 그의 얘기처럼 조감도는 실제로 완전한 공감적 경험의 방식이 되었을까. 현 시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그의 이야기가 전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실제로 조감도라는 새로운 시점의 등장은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 중 하나로 널리 활용되어 왔다. 아마 그 전의 오랜 기간 건축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투시도 기법에 의해 그려졌으며, 바닥에 딱 달라붙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을 나는새로운 발명품은 하늘에서 바라본새로운 시점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당시 비행기는 이동 수단의 고정관념을 깨는 굉장히 새로운 발명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호 이너지 또한 앞으로 비행기의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다. 또한 그 덕에 수직, 혹은 수평을 벗어난 새로운 삼차원의 시점이 등장하였으며, 비행기의 발전은 어찌 보면 건축의 패러다임을 전환과 함께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지난 100년간 항공기의 발달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 기술력의 발전은 계속되어 왔으나, 그 원리와 본질은 거의 흡사한 채로 머물러있다. 껍데기만 바뀌며 내연기관의 작동 방식은 본질적으로 동일했던, 지난 날의 자동차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렇듯 그는 비행기와 조감도가 불러일으킬 변화를 과대평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조감도에의 과한 찬양은 앞서 그가 말한 것들과 모순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가 같은 글에서 언급했듯 파사드의 개념은 이미 기능적 사용의 부재로 건축에서 제거된 요소라고 한다면, 저 멀리 원경에서 내려다 본 시점의 외관은 파사드의 본질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또한 그가 주장한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에서도 모순되는 부분이 생겨난다. 그는 조감도를 ‘complete space experience’라고 말하고 있지만, 조감하는 존재는 실제 공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일종의 절대자이며, 건축의 겉 껍데기만 바라보는 것이지 않은가. 우리는 과연 이것을 진정한 공간적 체험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또한 모더니스트로써 실용성을 전제로 하는 테크놀로지의 예찬론자이던 그가, 이러한 피상적인 공감적 경험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현재의 관점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오히려 조감도가 진정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는 견해들이 생겨나고 있다. 실제 거의 모든 사람이 눈에서 보는 것은 조감도 뷰가 아닌데도, 각종 설계 대회에서는 꼭 멋진 조감도가 필수적이며, 그런 비현실적인 장면이 언론에서 그 공간의 모든 것인냥 대문짝하게 내걸려서 대중에게 보도되는 것이 진정 옳은 방식인가 하는 의문이다.

조감도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은 전부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는 현 시대의 의문에, 과연 라슬로 모호 이너지는 무엇이라 응답하였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