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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노트/2022 봄학기

[건축디자인 이론] Maurice Merleau-Ponty,『Exploring the world of perception』중 'space' 읽기

1. 들어가며 - 조경에의 환멸을 느낀 나

'자신의 언어로 소통하는 조경가가 있는가?'

한국에서 조경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아쉬운 점이었다. 

이 나라에서 조경한다는 사람 중에 어느 누가 자신만의 일관된 철학이 있고, 스스로의 언어로 세상에 부딪히며 대중들을 설득하고 있는가.

건축에 종속되어 그들의 성미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조경 설계인가... 아니면 어디 큰 현상설계가 나올 때 마다 이것저것 여러 요소들을 그저 그렇게 끼워 맞춰 당선에 눈 먼 설계안을 제출하는 작자들이 우리를 가르치려드는 '선배 조경인'인가... 

책상머리에서 펜대만 굴리는 고상한 양반들과 실무에서 땀 흘리는 자들의 괴리가 너무 크다고 느낀다. 

펜대만 잡고 돌리는 작자들이 그동안 한국 조경계에서 무슨 철학을 생산해 냈는가. 그렇다고 실무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이 더 의미 있다는 건 아니다. 다들 머릿속에 무슨 철학이 있긴 하냐.

최근에는 어디 조경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기사로 접하는데 메타버스가 어쩌구... 아주 그냥 수저올릴 밥그릇만 있으면 어떻게든 끼워맞추려 애쓰는 세태를 보며 환멸이 났다. 한자리 해먹는 사람들이 저 모양이라니... 쩝. 

조경이라는 학문의 영역조차 정립되지 않은 채로, 조경한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고, 누구는 껍데기만 있고.

조경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그저 생산물을 기계처럼 찍어낸다. 덕분에 경영인 측면에서 보면 대부분 큰 돈을 버는데는 성공했겠지. 그런데 그게 진짜 성공한 조경인인가 싶다. 성공한 아버지 정도는 될 수 있겠네. 

사유하는 조경가가 대체 이 나라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냐!  오히려 건축쪽은 자기 세상이 너무 심오해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튼 조경인들은 자기 스토리를 좀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조경계에서 무슨 담론을 주도하기에는 일단 지식이 너무 부족하고,,, 가오도 없고,,, 빽도 없고,,, 뭐 서글프지만 그렇다.

그래서 더더욱이 일단은 닥치는대로(그리고 닥친채로) 공부하는 게 맞는 것 같고. 

뭐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건축학과의 건축디자인이론 수업을 듣게 되었다.

재밌을 것 같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 흥미롭다.

이번 수업을 가르치는 백진 교수님은 자신이 탐구하는 건축 철학이 있고(그 철학이 내 의견과 합치하든, 그렇지 않든. 그 존재 자체로 유의미하다. 한국 조경계에 자기 철학을 가진 자는 거의 부재하므로.), 여러 레퍼런스를 통해 새로운 건축적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철학이라는 것이 사실 꽤나 딱딱하기에, 그리고 그 딱딱한 것들을 원서로 읽게 되어 적잖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아무렴 이것저것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은 수업이라 열심히 들어보기로 다짐한다!  

 

 

 

2. 강의 목표와 내가 배워갈 것들

"나의 디자인 차별성은 어떻게 그 의의를 획득하는 것일까? '나'를 넘어서서 '우리'의 공동성을 획득하는 차별적인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을 앞에 두고, 건축가가 추구하는 '차이'의 진정한 기반이 되는 공유 또는 공동의 영역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것 - 이것이 이 수업의 주제이다.
전문가적인 지식과 기술의 산물인 건축물이 일상의 세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의미'가 깃들기 시작하고, 궁극적으로 지속가능성 - 즉 일상의 상황을 지원하고 지속시키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자리 잡아 나감 - 을 획득하는 것은 건축가의 한 바람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전문가적인 지식 및 기술의 배양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건축디자인의 윤리적 "기반(Ground)"을 이해하고 창작물을 그 지평 위에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반(Ground)"이란 다름 아닌 일상의 세계이다. 우리가 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익숙함(Zuhanden/ready-to-hand/familiarity)'속에 자기를 총총히 숨기고 있는 전반성적(pre-reflective) 영역이자, 또 그런 만큼 쉽게 주제화하기 어려운 신비의 영역이기도 하다.
본 수업은 건축디자인의 윤리적 지평인 이 일상세계를 "주제화(Thermatization)"하여, 그것이 펼쳐내는 다양한 상황의 양상과 구조를 발견하고 탐색한다.
또 이 안에서 건축물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마지막으로 이 역할을 지원하는 디자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전개한다.

- 2022년 봄학기, 건축디자인이론 1 강의 Syllabus 중 발췌 -

강의 목표에서는 우리의 '일상'을 이해하는 것을 필두로 하는데, 일상은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서 꽁꽁 숨어버린다는 역설을 전제로 한다. 고로 일상을 파헤친다는 것은 특별한 노력과 의식을 쏟아야만 가능한 행위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교수님의 사례로, 내가 지금 이 블로그에서 포스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기반(Ground)이 안정되어있기 때문이다.

기반이라는 것은 도서관의 테이블, 머릿속의 생각을 타이핑을 하면 화면에 텍스트들이 직관적으로 등장하게 시스템을 만든 애플의 기술력,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좌판, 그것을 받치고 있는 의자의 기둥과 다리, 그것을 받치는 도서관의 바닥, 구조체, 지반, 지구 등등이다.

이렇게 우리는 기반(Ground), 즉 일상에 너무 익숙하여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않게 된다. 물론 그 덕에 다른 행위(생각하고, 글쓰기)를 할 수 있기도 하다.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행위가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 대면서 가능한 건 아니니까. 

이렇듯 이 수업에서는 이렇게 이미 무뎌져 당연시되는 우리의 일상성을 재조명하고, 전반성적 영역에서 반성적 영역으로 끌어들여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추가로 내가 수업을 통해 배우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공간을 보는 눈'이다. 건축이든 조경이든, 답사 가서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잘 들여다보는 능력을 배양하고 싶다.

편협한 내 세상에서 좀 벗어나서, 건축학과 사람들은 혹은 교수님은 답사가서 어떤 것을 보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너무 궁금하고 배우고 싶다.

재밌겠다!!

 

 

 

3. 모리스 메를로퐁티

우선 강의는 2주간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 ~ 1961)의 글을 읽고, 1주는 하이데거의 글을 읽으며 전반성적(pre-reflective) 세계와 건축에 대해 공부한다.

메를로퐁티는 '신체 철학자'라고 얘기한다. 그전에 신체를 저급한 것, 고결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금욕주의도 그런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메를로퐁티는 그와 달리 신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신체가 우리의 의미를 밑바닥에서 규정하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우리가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다. 혹자는 저주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예컨대 나도 투시도 기법으로 세상을 보고 싶은데, 왜 절대자로서의 기회를 앗아갔나 하며 생각하면서. 그러나 메를로 퐁티는 우리가 신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물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제 읽은 글은 일반인을 상대로 강의했던 내용을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쉬운 글이라고 했는데도, 읽다보니 나에게는 꽤 challenging 했다는 것이 문제다... 심지어 교수님께서 하이데거의 글은 아주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소화해낼 수 있을지. 약간 아득해졌다. 

 

 

 

4. Exploring the World of Perception: Space 읽기

* 아래의 내용은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글을 읽고 필자가 직접 번역해가며 공부한 내용과 생각들입니다.

참고문헌 : Maurice Merleau-Ponty, “Exploring the World of Perception: Space” in The World of Perception, outledge Classics, trans. Oliver Davi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4, pp. 47-56

 

It has often been said that modern artists and thinkers are difficult. (...) If modern thought is difficult and runs counter to common sense, this is because it is concerned with truth; experience no longer allows it to settle for the clear and straightforward notions which common sense cherishes because they bring peace of mind. (...) Thus modern thinkers seek to render obscure even the simplest of ideas and to revise classical concepts in the light of our experience. 

- Maurice Merleau-Ponty, “Exploring the World of Perception: Space” in The World of Perception, outledge Classics, trans. Oliver Davi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4, p. 49.

>>>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우리한테 모더니즘 시대의 생각들은 꽤 straightforward 한데, 당시에는 영 그렇지 않았나보다. 아무튼 읽어보자. 

 

전통 과학은 공간과 물리적인 세계의 명확한 구분을 기반으로 한다. 이에 공간space은 삼차원에서 정의된 일정한 medium으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상관없이 동일하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물체object는 움직이면 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물체가 극에서 적도로 간다면, 기온의 증가로 인해서 그것의 무게가, 그리고 어쩌면 형태가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무게와 형태의 이러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극에서나 적도에서나 동일하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변화는 물리적 조건 중 하나인 온도이다. 따라서 기하학의 영역과 물리의 영역은 온전히 구분된 상태로 남는다 : 형식의 세계와 내용content의 세계는 섞이지 않는다. 


물체의 기하학적geometrical 특성은, 물리적physical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면 이동 후에도 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 과학에서 가정되었다.

>>> 전통 과학에서 Space-form은 기하학적 특성이므로 변화하지 않는 것, Object-content는 변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흔히 말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으로, 우리는 공간 그 자체를 휘어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어떻게 물질들이 단순히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바뀔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에 이것을 이용한다면, 모든것이 바뀐다.

게다가 공간은 다양한 영역들regions와 차원들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들은 더 이상 상호간에 교환가능한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움직이는 신체의 특정한 변화들을 초래한다.

>>>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앞서 말한 전통 과학의 관념들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각각 다른 원칙에 귀속되어, 동일성과 변화의 구분이 명료하게 정의되는 세상 대신, 우리는 온전히 self-identical한 대상을 생각할 수 없는 세상에 있고, 마치 형식form 과 내용content이 혼합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경계가 희미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한 세상은 한때 유클리드의 uniform space에서 존재하던 엄격한 framework가 부족하다. 

우리는 더 이상 공간과 그것을 차지하는 대상의 명료한 구분을 지을 수 없고, 공간에 대한 순수한 관념idea과 공간이 우리의 감각에 제시하는 구체적인 spectacle을 구분할 수 없다.

>>> 우리는 모든 것이 혼재되어 경계가 희미한 세상에 살고 있고, 온전히 self-identical한 대상을 생각할 수 없고(절대적인 존재의 부정)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상대성). 공간이라는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균질한 medium이고, 그 안의 사물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처럼 맞물려 있지 않으며, 사물을 딱 떼어내면 공간이라는 틀이 남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과학의 발견이 근대 회화와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전통적인 doctrine은 윤곽선과 색채를 구분했다: 작가는 색채를 입히기 전에, 공간적 패턴을 그려놓는다. 반면 세잔은, '칠하는 순간에 그리는 것이다(as soon as you paint you draw)' 라고 말했는데, 이는 인식의 세상이든 그림(세상을 표현한 것)이든, 우리는 그것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세잔은 외곽선과 대상의 형태를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즉, 그것은 색상의 배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그가 지칠줄 모르는 인내로 사과를 칠하고, 그 질감을 나타낼 때, 그간 수행된 기교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부풀어 오르고 파괴되는 이유이다.

>>> 회화의 전통은 윤곽선과 채색이었는데, 세잔의 등장은 그 경계를 허물었다. 이는 전통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도 절대성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세상을 재발견하려는 이런 흐름에서, 모든 전통 예술의 precautions은 내던져진다. 전통적인 doctrine에 의하면, 회화는 perspective에 기반한다.


이것은 예컨대 화가가 풍경을 마주했을 때, 그가 캔버스에 그가 본 것의 완전히 전통적 재현을 그의 캔버스 위에 묘사할 대상을 선택한다.  그는 근처의 나무를 보고, 시선을 더 멀리해서, 길까지 보고, 결국 지평선을 보게 된다; 다른 대상들의 겉보기 치수(apparent dimension)들은 그가 다른 곳을 볼 때마다 바뀐다.


(...) 이러한 방식으로 그려진 풍경은 평화로운 모습, 품위있는 분위기를 갖는데, 그들이 무한한 것으로 고정된 시선의 아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떨어져서 존재하며 관찰자들을 들어오게끔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량한 동반자이다: 이렇듯 극도로 쉬운 움직임에 저항을 만들어내지않으면서, 시선은 풍경 너머로 저항없이 지나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인식에서 우리가 세상을 직면할 때 일어나는 방식이 아니다.

>>> 세잔이 파괴한 것은 윤곽선과 색채의 구분 뿐이 아니라 투시도법perspective에 기반한 회화의 전통이기도 했다. 기존의 투시도법을 이용한 회화는 지정된 소실점을 갖고 매끈한 결과물로 완성된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의 주위에 놓인 것들을 지나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특정한 시점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어떤 장소 내에서 이러한 연속적인 스냅샷은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겹쳐질 수 없다.


화가가 이런 시각적 표현의 과정을 마스터하고 단일한, 불변한 풍경을 그들로부터 추출해내는 것을 성공해내는 것은 오직 보는 것의 일반적인 과정을 interrrupting하면서 이다: 종종 그는 그의 한 눈을 감고 특정 디테일의 명확한 사이즈를 연필로 측정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고친다. 모든 이러한 디테일들을 이른 분석적인 시각으로 적용하면서, 그는 자유로운 시각적 인상과 일치하지 않는 풍경을 캔버스에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은 펼쳐지는 움직임을 통제하면서 흔들리는 삶을 죽인다.


세잔 이후로 많은 화가들이 기하학적 원근법의 규칙을 거절했다면, 이것은 그들이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풍경의 탄생을 그들이 포착하고 재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그간의 회화처럼 하나의 시선에 고정되어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바라보는 대상이 바뀔 때마다 계속 다른 장면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그들은 분석적인 overview에 안주하는 것을 꺼렸고, 인식적인 경험 그자체의 느낌을 재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그들의 그림에서 다른 영역들은 다른 시점에서 보여졌다.


게으른 감상자는 여기에서 '시점의 오류'를 볼테지만, 자세히 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떤 두 대상도 동시에 보여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그 시간만큼 공간이 분리되는 세계, 존재가 주어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등장하는 세계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 실제로 우리가 세상을 보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그 시간동안 공간이 분리된다. 

고로 공간이라는 것은 더이상 절대적 관찰자에 의해서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점없는 것이 아니고, 육체가 없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 위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 요약하면, 순수히 지적인 매개(medium of pure intellct)가 아니다.


장 폴한(Jean Paulhan)이 최근에 언급했듯이, 근대 회화에서 공간은 '심장이 느끼는 공간', 우리가 위치한 공간, 우리와 인접한 공간, 그리고 우리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공간이다.폴한은 이에 더하여 말한다. "기술적인 측정에 전념하고 양적으로 소모되는 시대에, 입체파 화가는 (지성intellect 보다는 심장heart에 맞춰진 공간에서) 인류와 세상 사이의 결합과 화해를 조용히 기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따라서 공간이라는 것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절대 동시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순전히 지적인 절대자가 느끼는 불변한 것이 공간이 아니며, 우리의 육체가, 공간적 위치가 존재해야만 지각할 수 있는 '심장이 느끼는 공간'인 것이다. 

과학, 회화,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 심리학의 발자취는 우리와 공간 사이의 관계는 떨어져 있는 먼 물체에 대한 순수한 육체가 없는 주체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의 공간에 거주하는 존재의 관계라는 사실을 일깨운 것 같다.  


이것은 우리가 말브랑슈(Malebranche)에 의해 강조된 유명한 광학적 착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달이 수평선위에 있을 때, 그것이 천정에 있을 때보다 보이는 것. 말브랑슈는 사람의 인식이 추리reasoning의 어떤 단계에서 행성의 크기를 과대평가한다고 추정했다. 우리가 그것을 골판지 튜브나 성냥갑을 통해서 본다면, 왜곡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달이 처음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들판, 벽, 나무들 위에 있는 그것을 흘끗 보기 때문에 유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양의 간섭하는 물체는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있음을 인식하게 하여, 따라서 우리는 이 거리에도 불구하고 실제처럼 크게 보이려면, 달은 실제로 매우 커야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근거하여, 인지하는 주체는 고민하고, 평가하고 결론내리는 과학자와 유사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크기는 사실 우리가 판단한 크기이다.


이것은 오늘날 대다수의 심리학자들이 지평선 위의 달의 왜곡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다.  체계적인 실험을 통해 우리의 시야에서 지평선에 있는 대상의 겉보기 크기는 훨씬 일정하지만, 그들이 수직면으로 갈때는 매우 빠르게 작아진다는 것이 거의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것은 아마도 왜 그렇냐면, 우리가 지구 위를 걷는 존재로서, 지평선은 우리의 대부분의 중요한 움직임과 활동이 발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Thus what Malebranche attributed to the activity of a pure intellect, psychologists of this school put down to a natural property of our perceptual field, that of embodied beings who are forced to move about upon the surface of the earth(해석못함ㅠㅠ 도와주세용).

>>> 말브랑슈의 사례도 우리가 공간에 거주하는 존재라는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절대적 intellect가 아닌, 공간을 심장으로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기하학에서 처럼 심리학에서, 육체가 없는 지성intellect에게 완전히 열려 있는 단일한 통일된 공간의 개념은, 다른 영역을 구성하고 특정한 특권적 방향을 갖는 공간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이것들은 우리의 구분되는 신체적 특징들과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우리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정신 그리고 육체'가 아니라, 인간은 '육체를 지닌 정신'이며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그의 몸이 그러한 것들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라는 관념을 얻게 된다.


우리는 다음 강의에서 이것은 공간에서만 진실이 아니고, 보다 일반적으로 모든 외부 대상(우리는 오직 우리의 몸을 통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볼 것이다. 인간의 특성을 입고있는 그들 역시, 정신과 육체의 결합이다.

>>> 결국 우리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는, 육체를 지닌 정신이며 이런 것들이 기반으로 존재해야만 세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아주 현상학적인 강의 마무리이며 다음 강의가 두려워진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뫼비우스 띠를 계속 걸어가는 개미가 그것을 평면이라고 인식하는 것처럼, 그리고 절대자만이 그것을 알 수 있고 해당 존재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육체없는 절대적 지성이 존재하는 uniform space라는 것은 없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모두 서로의 존재를 통해 상대적으로 인식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body가 존재해야만 세상에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상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글인 것 같다. 

그리고 귀에 익은 단어였지만 구체적 내용은 알지 못했던 현상학에 대해서 좀 알게되었다. 그리고 세잔의 그림이 갖는 의의도 알게 된 것 같고.

생각해보면 세잔이 대단한게, 익숙한 물건을 새롭게 바라보는게 정말 힘든 건데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회화의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니 대단하다. 심지어 그 논리가 굉장히 명료하다!

'저걸 왜 못하지?' 하며 돌이켜보면 쉬워보이는 것들이, 막상 내 앞에 닥치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최근 더욱 깊게 통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주일에 두편의 에세이를 쓰고 네 번의 크리틱을 받는 삶을 살고있기 때문에. 상상력 너머를 상상한다는것은 정말 얼마나 힘든 일인가... 창작의 고통이란 이토록 강력한것...

그리고 앞으로는 철학 원서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는 행위는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걸 누가 읽냐... 

 

 

5. 읽고나서 질문하기 

Q1.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중, 특히 회화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은 무엇이 더 있을까?

공간에 대한 경험을 반성적 영역으로 끌고오기 위해서, 보다 원초적인 감각인 ‘인식’ 그 자체에 관한 글을 읽으며, 시각적으로 익숙하던 회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세잔에 관한 내용이 인상깊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익히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근법의 해묵은 전통을 파괴한 것이 미술사에서 세잔의 역할이었다면, 당시 미술사에서 또 다른 관점들을 제시했던 작가들은 또 누가 있었지, 생각하게 된다.

예컨대,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돌을 깨는 사람, 식사를 하는 평범한 인물들을 그려 새로운 대상을 작품의 세계로 불러들인 귀스타프 쿠르베나, 혹은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인상’을 파격적인 습작같은 모습으로 표현한 클로드 모네의 관점 또한 미술사에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것들이다. (혹은 미처 필자가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새로운 관점들이 있을수도 있다.)

이렇게 새로운 관점들의 사례가 무엇이 있는지, 논의를 통해 우리가 이미 익숙해진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모티브를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Q2. 이 시기의 인물들 중, 전혀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면 궁금하다.

최근 라슬로 모호 이너지(1895~1946)의 <The new vision and abstract of art, 1947> 중 공간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pp.56-64) 읽었는데, 몽티스 메를로 퐁티(1908~1961)와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라 그런지, 구체적인 주제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 새로운 vision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으며, 읽고 나서 서로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과연 이 시기는, 혹은 이전 시대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분위기였길래 이런 의견들이 형성되는지 궁금하다.

혹은 당시에 라슬로 모호 이너지와, 몽티스 메를로 퐁티의 의견과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이나 관점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그 의견은 무엇인지 알고싶다.

모더니즘 건축은 현상학에 심취한 교수님들의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세상인가? 어디 상반되는 의견이 있어서 비교하면 재밌겠다. 

6. 학우들의 질문

Q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을 것은 나 자신 뿐인가? 

메를로 퐁티는 모든 것이 정의되고, 카테고리화 되는 세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근거(Ground), 딛고 설 수 있는 것, 확실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나의 존재, 나. 뭐 이런 것들 아닌가? 

멜로 퐁티의 의견을 보면,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아주 명징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애매함에 대한 불안함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답이 있는 mathmatical knowledge와 정답이 없는 practical knowledge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실 생활에서 사용하는 practical knowledge는 정답이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애매함을 살고 있음에도 그것을 굉장히 불안해한다. practical knowledge에서 중요한 것은 지혜, 그리고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진정 우리를 혼돈에 빠지게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윤리적인 삶에서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너무 불안하게 생각할 피룡가 없다. 

기반 : 내가 누구와 다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서로 공유하는 기반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르다'는 표현은 공유하는 기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를 들어 언어에서, 다름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라는 동일성이 기반에 있기 때문이다. 

기반은 존재한다. 그러한 기반은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를 존다. 기반이 존재하여 우리는 서로 다 다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반은 위대하다. 다름을 허용해주고 그 다름을 이해해줄 수 있는 근거는 공동의 기반이다. 

물리적 관점에서 보아도, 우리는 이 땅을 공유하고 있고, 거기엔 일정한 풍토가 존재하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이 존재하고, 그 집단이 공유하는 언어, 관습, 제스처,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내는 몸의 자세가 있다. 예컨대 서양 사람들은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을 수 없듯이, 우리에게는 그렇게 공유하는 기반이 존재한다. 

이렇게 기댈 수 있는 기반이 없다면 세상을 돌아가지 않으며, 이것이 'Ethos'이다. 어떤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하는 것, 기대가 되는 것. Ethos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행동, 패턴들이다. ethos에서 파생된 것은 ethics윤리 이며, 이것에는 답이 없고 우리가 비례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한다. 반면 morality도덕성은 정답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법으로 끌어내려서, 누구를 벌하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건축을 한다는 것은, mathmatical knowledge만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물론 중요하다), practical knowledge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Q2. 세잔 등 회화의 예시 때문인지 데스틸이 떠올랐다. 데스틸은 기존의 벽-슬라브의 관계를 벗어나고, 파사드, orientation도 여기저기 향하고 있는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데스틸이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예시가 될 수 있는 것이 맞는가? 

A. 이 질문이 메를로퐁티의 글과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데스틸은 유클리디안 건축이다. 향orientation이 여기저기 향해있다는 것은 그것의 뿌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뿌리가 없는 건축은, 그렇기 때문에 향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등을 볼 수 없다. 빤히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어력을 갖추지 못한다. 거울에 서면 좌우가 바뀐 채로 볼 수는 있을 지언정, 사실 내 앞의 모습도 나는 다 볼 수 없다. 빤히 내 앞의 내 것인데도, 내가 제어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 신체의 비밀이다. 

왜 건물이 파사드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가 근본적으로 앞과 뒤를 갖고 있기 대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앞에 두려 한다. 사냥꾼이 사냥할 때 짐승을 앞에 두어야하며, 뒤에 두면 사냥꾼이 오히려 죽고야 만다. 이렇게 공간은 구분이 있고, 앞과 뒤가 구분된다는 것이 메를로퐁티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건물은 땅에 붙어있고, 우리는 같은 땅을 공유한다. 출입문이 왼쪽, 오른쪽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1층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건물이 땅에 있네? 이 단계에서 1차적 불확실성이 제거되고, 1층에 문이 있네? 여기서 또 하나의 불확실성이 제거된다. 

반면 데스틸은 1층을 거부하고, 문을 거부하고, 위-아래, 전-후 등 사방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반-메를로퐁티적인 생각이며, 아무튼 향이 있다는 것은 유클리디안 기하학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도시는 건축물의 높이가 들쭉날쭉하고, 정돈된 풍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중세 사람들은 길을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건물은 땅에 붙어있고 입구가 1층에 있는 사실만으로 건물은 orientation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스틸 이후의 건축, 파사드가 없는 실험을 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재밌던 케이스이지만, 데스틸 건축 중 실제로 지어졌던 리트벨트의 슈뢰더 하우스는 페이퍼 상의 주장과 달리 orientation이 잘 갖춰져있다. 실제로 들어가면 내가 어디로 움직일지 잘 알게 된다. 

 

Q3. 절대자의 눈에 대해 얘기한 것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우리가 설계를 할 때, 입면과 3D 모델링을 마치 절대자인 것처럼 지어나가는데, 사람의 인식에서 벗어난 이런 툴을 써서 건축을 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의견 :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한편으로 건축가들의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기반이 있어서 일종의 자유를 부여받는 것이 않나요. 

A. 네 좋은 의견입니다. 우리는 분명 절대자처럼, 프로젝션된 것, 위와 아래가 똑같이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없는데도 그리곤 한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보완해야하는지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는 건축가라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그 영역이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 그것들을 똑같이 중요한 정도로 파악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처치해야 하는지, 조리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평면이 도움이 된다. 이것은 오른쪽 코너, 왼쪽 코너가 모두 균등하게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필요하다. 일종의 절대자의 관점으로 보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놓치는 것이 있다. 실제로는 여기, 저기, 거기를 엮어서 스토리가 전개되며 모든 것이 동등하게 중요하지 않다. 

이 두가지를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절대자의 시점이고, 둘째는 실제 상황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해서 어떤 현상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다.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 우리가 더 좋은 건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중에 읽을 아티클 중, 로빈 에반스가 쓴 것이 있는데, 그 사람은 평면을 놓고 분석을 한다. 평면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삶의 상황, 더 중요하게는 사람들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복도와 방이 어떤 방식으로 놓여 있는가, 이것을 통해 우리는 방의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의 관계가 될 것이다. 이런 삶의 plot을 보여주는 것이 평면이라고 한다. 평면은 이렇게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Q3-2. 절대자의 관점은 사실 우리가 절대 볼 수 없는 왜곡된 시선 아닌가. 근데 영상을 찍으면 바다 전체를 찍는 것 보다 줌해서 찍는 것이 실제로 느긴 감정들과 더 비슷한 경우들이 있다. 

A.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 공간을 균질하게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얘기인 것 같고,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드로잉이 필요하고 그런 것 아닐까. 

Q4. 흔히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들, 혹은 메를로 퐁티의 world of perception, world of reasoning 처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지점도 있는 것이 아닐까? 

A. 지각perception과 추론reasoning이 구분되는 문제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또한 데카르트처럼 지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합리적 추론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지각의 영역과 추론의 영역은 따로 있는 것인지, 그 사이에 어떤 공간이 또 있을 수 있는지.

지각 안에서 '사과가 있네', '천장에 등이 있네'하며 인식하는 것 - 우리가 순수한 물체 덩어리를 지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건 누가 가르쳐준걸까? 우리의 지각은 (나쁘지 않은 의미에서) 순수함이 있고, 의미로 가득 차있다. 그 의미는 지성이다. 사과와 배가 다르다는 것, 식물과 동물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있다. 우리가 지각을 볼 때 오해하는 것은, 지각은 지적인 자극이 배제되어 있고 순수하게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하게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각이라는 것은 이미 지적인 것이다. 이미 모든 의미가 들어가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각이 가능하다. 

따라서 지각perception은 여기까지, reasoning은 그 다음이라고 나눌 수 없다. 지각은 저질, 합리적 추론은 고질? 그렇지 않다. 그 전의 사람들이 워낙 지각을 무시하고, 합리적 추론만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런 시기에 지각을 되살리고 싶어했던 사람이 메를로 퐁티이다.

'저기에 사과가 있다' - 어떻게 내가 그 지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아주 단순한 말인데, 그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가 미리 사과가 무엇인지 알지 않는 한, 우리는 알 수 없다. 지적인활동의 많은 활동은 카테고리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라고 표현하며 지각에는 이미 그런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