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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노트/2022 가을학기

[실존철학] 자아에 대한 새로운 관점: 온라인 자아

이 글은 이번 가을학기에 실존철학 수업을 들으며 썼던 글이다. 

이번 할로윈에는 충격적인 참사가 있었고, 나도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반응이 다 나 같지는 않은 것 같더라. 

그래서 이 나라가 너무 비이성으로 가득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근데 막상 내 주변 사람들을 잘 생각해보면, 꽤 이성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런 괴리에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런 괴리가 내 인간 관계가 잘 갖춰져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괴리는 어디서 오는걸까? 

나는 이 괴리의 기원이 어쩌면 온라인 세상과 오프라인 세상의 우리는 다른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온라인 자아 라는, 듣도보도 못한 용어를 만들어 냈고, 그것에 대해서 꽤 긴 글을 썼다.  

A4 11장에 이미지 없이 꽉꽉 눌러쓴 글이다. 과제를 채점해주시는 선생님을 뺀다면 과연 누가 읽을까 싶지만... 애초에 수요 없는 글들로 가득한 블로그이니 그냥 저냥 올려보기로 한다. 

선생님의 피드백도 올려본다. 감사합니다^^

 

[현 세태와 그 원인: 온라인 세계 속 온라인 자아의 특징]

 

현 세태: 현실 세계와 온라인 세계의 괴리

10 29일 이태원에서 충격적인 참사가 발생했다. 토요일의 늦은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구역감이 들었고, 우울했고, 마구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명확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수 많은 시선들이었다. 연이은 뉴스 속보에 줄줄이 달리는 댓글들을 보며, 세상에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니, 몹시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성으로만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언제나 비뚤어진 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럴 수 있지 생각하며, 조금은 씁쓸하게 그런 시선들을 받아들였다.

직접 캡쳐한 사건 발생 익일 00시 ~ 1시 사이의 뉴스 댓글 기사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기사들을 볼수록, 이런 비뚤어진 시각이 소수의 의견이 아니라 오히려 댓글창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고, 심지어 언론사의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비슷한 의견들이 매우 순도 높은 추천 비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에는 친한 형과 관악산을 등반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로, 관악산을 오르며 내가 지난 밤 동안 겪은 생각과 느낌을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형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그런 기사를 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랬다. 나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 세상에 나 스스로 더욱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아수라에 스스로 매몰되는 것, 타인과 세상에 대해 극심한 분노를 느끼는 것 모두 나의 의무는 아니었을 테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 갔고, 온라인 세계에 갇혀 환멸을 느끼던 나는 오프라인 세상의 실제 사람들을 마주했다. 다행히도 이들은 다들 나와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다들 나와 비슷한 괴로운 주말을 보냈고, 비슷하게 슬퍼했다. 내가 본 인터넷 기사의 댓글에서처럼, 어딘가 비뚤어진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궁금했다. 현실과 온라인의 괴리는 어째서 발생하는 걸까? 같은 사건을 보았고, 같은 사람들이 생각을 했을 것인데, 그 결과는 완전히 상이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의심의 여지없이 실제로 경험한 현상이다. 이런 일은 어째서 발생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경험한 사람들의 표본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달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 일 뿐 아니라, 동일한 사건에 대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명백한 입장 차이가 있는 경우는 경험상 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충돌이 분명히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현상의 원인은 어쩌면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갖고 있는 인격체와 다른, 새로운 종류의 어떤 인격체들이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나 스스로도 현실 세계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온라인 세계에서의 그것들과 큰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나와 맞닿아 있지만 나와는 또 다른 온라인상의 인격체를, 나는 온라인 자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자아는 어떤 특징을 갖는지, 기존의 전통적 자아와 차이는 무엇인지, 그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현상들은 무엇인지 나의 생각을 보일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새로운 자아를 통해 우리가 더욱 생각해 볼 문제는 무엇인지 밝히도록 하겠다.

 

 

새로운 자아의 탄생: 온라인 자아

사르트르는 의 형식적 현존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며, 칸트가 가 없는 의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으며, 사르트르 자신 역시 이것에 동의하면서 나의 지각 또는 사유를 항상 나의 것으로간주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경험의 가능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각주:1]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나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나의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자아가 새로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손쉽게 다양한 포털 사이트들에 각기 다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형성하고, 새로운 닉네임과 역할을 부여받는다. 나는 이렇게 생성되는 많은 계정들이 단순히 우리의 새로운 아이디들에 불과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들은 바로 우리의 새로운 자아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동탄에 사는 유부녀이면서, 야구팀 SSG 랜더스를 응원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또한 이러한 나는 ‘SSG 랜더스 갤러리동탄 맘 카페라는 두 개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동시에 가입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SSG 랜더스 갤러리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나의 온라인 상에서의 정체성과, ‘동탄 맘 카페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나의 온라인 상에서의 정체성은 모두 동탄에 사는 유부녀이면서, 야구팀 SSG 랜더스를 응원하는 실제의 나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온라인 상에서 그 둘의 정체성, 그리고 온라인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내가 SSG 랜더스 갤러리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의식하고 있어야할 점은, ‘여기는 SSG의 팬들이 모여있는 곳이고 여기서의 나 또한 그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때 내가 동탄에 살고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은 이곳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그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SSG 랜더스 팬들의 주요 논의맥락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SSG 갤러리에서 활동하면서 결국 ‘SSG의 팬이라는 그 단 하나의 정체성만을 고려할 수 밖에 없고, 그 이외의 다른 요소들은 나의 정체성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약 내가 동탄 출신의 유부녀라는 정체성을 ‘SSG 랜더스 갤러리에서 강하게 드러내는 순간, 예를 들어 주말에는 동탄의 병점역의 스타벅스가 정말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에, 병점 중앙로에 위치한 동탄 투썸 플레이스에 가는 것이 더 낫다는 내용의 글을 작성하는 순간, 그것은 논의맥락을 매우 벗어나는 것으로 인식되어 다른 랜더스 팬들에 의해 옹호되지 못하며, 심지어 어그로 글로 인식되어 뭇매를 맞을지도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글은 동탄 맘 카페에서 주말 나들이 때 도움이 되는 글로 인식될 수 있음에도, 내가 논의맥락에 따라 나의 정체성을 온전히 소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의 자아는 아주 많은 정체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SSG 랜더스 갤러리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우리는 ‘SSG 랜더스 팬이라는 나의 정체성의 아주 일부만을 의식하며 활동할 수 밖에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동탄 맘 카페라는 카페에서, 나는 동탄에 사는 유부녀일 뿐, SSG 랜더스 팬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어쩌면 그것을 더욱 숨길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동탄 맘 카페에서 타인들과 함께 공유하는 논의 맥락을 고려했을 때, 내가 SSG 랜더스의 팬이라는 사실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SSG 랜더스 갤러리에서 활동중인 자아는 동탄 맘 카페와는 전혀 다른 자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이것을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자아: A

SSG 랜더스 갤러리에 가입한 나의 자아: A*

동탄 맘 카페에 가입한 나의 자아: A**

 

 

온라인 자아들의 관계

이렇게 원래의 ’(A)에서 파생된 새로운 온라인 자아는 A*, A** 두 가지이다. 이제 새롭게 형성된 이 자아들의 관계가 서로 어떤지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AA*을 자신의 자아라고 간주할 것이다. 왜냐하면 A*는 내가 SSG 랜더스에 관련된 활동을 하기 위해, 나로부터 직접 만들어낸 새로운 자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AA**을 자신의 자아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A*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자아가, A**를 자신의 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까? 이 둘은 다른 자아이기 때문에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만약, A*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자아가, A**를 자신의 자아라고 인식해본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SSG 팬인 내가(A*), 동탄 맘 카페에서 활동하는 나(A**)를 동일한 자아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SSG (A*)인 내가(A), 동탄 맘 카페(A*)에서 활동하는 나(A)와 같다고 생각한 과정을 거친 결과로 가능한 것이다. , 이는 A*A**를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A라는 매개를 통해서 서로를 간접적으로 인식한 결과로 해석된다. 이를 통해 결국 A*A** 의 자아는 A라는 매개 없이 서로를 동일한 자아라고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A*A** 의 관계는, 절대 직접적으로 나의 것으로서로를 간주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는 간접적(매개적)으로는 나의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나의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관계이다. 이는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롭게 생겨난 자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다시 앞서 사르트르로 되돌아가 보면, 사르트르는 나의 지각 또는 사유를 항상 나의 것으로간주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경험의 가능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이 형성된 온라인 자아(A*A**)들은 앞서 살펴보았듯 서로를 나의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 자아들의 경험을 규정함에 있어서 사르트르 체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자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한 자아인 온라인 자아, 따라서 새로운 특징들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어 이 특징들이 무엇인지 설명하도록 하겠다.

 

 

온라인 자아의 네 가지 특징

앞서 시대가 변화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자아인 온라인 자아를 생성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온라인 자아는 기존의 자아과는 다른 특징을 가짐을 밝혔다. 과연 전통적 자아와 온라인 자아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지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으며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익명성[각주:2]

온라인 자아의 가장 큰 특징은 익명성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발언을 하기 위해 이름을 드러낼 필요가 없으며, 그 누구도 온라인 세계에서 누군가가 남긴 댓글을 보고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밝혀라하며 묻지 않는다. 대신, ‘내 얼굴 보고서도 이런 말 할 수 있는지 보자와 같이, 익명성의 세계에서의 발언은 용인하되 다만 익명성이 없는 세계에서는 동일한 행위를 하지 못할 것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온라인 자아는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것이 온라인 세계에서 상호간의 대전제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2. 낮은 책임감

두 번째로는 현저히 낮은 책임감이다. 이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앞의 특성과 높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온라인 상에서 우리의 많은 행위들이, 아주 높은 확률로 어차피 처벌받지 않으며, 또한 상대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온라인 세계에서는 너무나 많은 무책임들이 공공연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하나하나 물색해서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실제 세계보다 관대한 처벌 기준이 용인되는 것이 필연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온라인 상의 우리에게 현저히 낮은 책임감을 부여하며, 더욱 재앙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만든다.

3. 높은 휘발성

세 번째는 온라인 자아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높은 휘발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온라인 자아의 특성이라기보다, 온라인 자아(A*)가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자아(A)로 받아들여질 때 발생하는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온라인 자아는 너무 많은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오히려, 정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정보를 필요한 정보불필요한 정보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아주 일부의 필요한 정보를 제외한 불필요한 정보는 기억에서 쉽게 휘발된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얻는 과정에서, 어떤 정보를 걸러내면서 원하는 정보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기계적으로 불필요한 정보를 쳐내며 원하는 정보에 간신히 도달하여 그 알짜 정보를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도달한 아주 일부의 알짜 정보 역시, 실제 세계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정보에 비하면 매우 휘발성이 강하다. 예를 들어, ‘여자도 군대에 가야한다는 주장을, 마이크를 들고 직접 말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와 인터넷에 게시된 글로써 접했을 때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나는 만약 여자도 군대에 가야한다는 주장을 마이크를 들고 실제로 하는 사람을 실제로 마주친다면, 그의 주장 뿐 아니라 그 근거는 무엇인지, 주장하는 자의 외적인 특징, 차림새, 목소리 어떠했는지 뿐 아니라 그 발화가 어디서 이루어졌는지, 배경이 어땠는지 등의 부가적인 상황마저도 언제든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온라인 상에서 여자도 군대에 가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기억하지는 않을 것만 같다. 내가 어쩌다가 그 글을 읽게 되었는지, 글쓴이는 어떤 문체를 사용했는지, 그의 주장을 이루는 논증과 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금세 휘발될 것이다. 심지어 근시일내로 내가 그 글을 읽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4. 빠른 생산성

마지막으로는 온라인 자아들이 무언가 결과물을 생산하는 과정이 너무나 손쉽고 빠르다는 것이다. 먼저 온라인 자아들이 논쟁을 벌이는 상황을 하나 가정하자. 나는 ‘SSG 랜더스 자유 갤러리한화 이글스보다는 SSG 랜더스의 팬서비스가 더 좋다는 글을 작성했다. 그러나 한 온라인 자아가 나의 글에 반박하며, 자신이 SSG 랜더스 선수의 싸인볼을 받지 못했다는 댓글을 달며 한화 이글스의 팬서비스가 더욱 좋다고 주장한다. 이 상황을 반박하기 위해, 나는 원 글을 수정하거나 혹은 댓글로 나의 의견을 보완하면서 아주 빠르게 의견을 수정할 수 있다. 이어 나에 동조하는 댓글이 여럿 달린다. 그리고 나에게 동조하지 않는 비추천과 댓글 역시 여럿 달린다. 내 글은 자유 갤러리에서 HOT 갤러리로 이전된다. ... 나는 또 다시 댓글로 나의 의견을 보완하고, 내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해나간다. ... 이러한 과정에 계속 이어지면, 우리는 단 하나의 글에 수백명의 찬성과 반대가 오가는 콜로세움을 완성할 수 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수백명의 의견이 교환이 오가는 논의의 장을 생산해낸 것이다. 그러나 오프라인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논의의 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프라인 상의 대화에서 우리는 상대의 주장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듣고, 조목조목 반박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어쩌면 아주 빠르게 상대의 의견에 승복하며 논의가 마무리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라인 세계에서는 아무도 꼬리 내리지 않는다. 또한, 상대의 주장을 귀 기울여 듣거나, 발언을 주거니-받거니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상대가 반박하는 댓글 하나를 작성할 시간에 그것보다 더 많은 댓글을 작성하여 나를 옹호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를 옹호하는 자들은 나의 닉네임만 보고 추천 버튼을 누를 것이고, 나에게 반박하는 상대의 닉네임만을 보고 비추천 세례를 퍼부을 것이다. 이렇게 온라인 자아들은 현실 세계보다 아주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온라인 자아의 특성을 통한 사건의 재구성

이러한 온라인 자아의 특성들을 통해, 실제 세계와 온라인 세계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상이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재구성해볼 수 있다.

국회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를 향해서 누군가 아주 무분별하게 심한 수위의 인신공격성 발언, 예를 들어 xx는 대가리가 깨졌다!’는 발언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이를 듣고, ‘xx...’ 분노가 치민다. 나는 아주 붉으락푸르락 해진다. 이때 나를 지켜보는 사람은 정치인, 기자단 등 어림잡아도 최소 300명은 되어보이고, 나는 그들 앞에서 인신공격을 받는 나의 당황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당연히 그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려 들 것이다. 실제 세계에서 그러한 발언을 들었을 때,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불쾌함은 그를 어떻게든 엄벌하고 싶은 욕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치 기사에 내가 댓글을 달았다고 생각해보자. 나의 댓글에 추천과 비추천이 약 300개 이상이 달린 것으로 보아, 나의 의견에 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대댓글로 아주 무분별하게 심한 수위의 인신공격성 발언, 마찬가지로 xx는 대가리가 깨졌다!’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xx...’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온라인 상에서 익명성의 가면을 쓴 채로 댓글을 남긴 자를 실제로 누군지 특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우며, 그를 특정하더라도 이후의 절차 또한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결국 그를 실제로 처벌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온라인 자아의 특징 익명성). 또한, 이런 일은 온라인 상에서 매우 비일비재한 일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 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의견을 남긴 모두가, 대댓글로 비슷하게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을 터치 한 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왜인지 처음 느꼈던 모멸감과 불쾌함 역시 조금은 약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나는 결국 어떻게 대처하는가? 우선 그의 댓글에 있는 비추천 버튼을 냉큼 누른다. 그 이후에, 똑같이 그를 향해 인신공격으로 맞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신공격에는 인신공격이다. 상대가 먼저 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맞설 수 밖에 없다. 비슷한 수준으로 그에게 공격 댓글을 남긴다(온라인 자아의 특징 - 낮은 책임감). 꽤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까지의 과정은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온라인 자아의 특징 - 빠른 생산성).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나는 누가 나에게 어떤 비난의 댓글을 달았는지 사실 잘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 말고도 수십개의 기사를 더 보았고, 수백개의 댓글을 더 읽은 뒤에 잠에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남긴 댓글 목록을 들여다 보지 않으면, 내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는 것, 이런 논쟁이 있었다는 것 마저도 기억해내지 못할 것 같다. 몇 개월에 한번씩 내가 남긴 댓글 목록을 들어가 보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그칠 뿐 아니라 내가 이런 말을 왜 했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온라인 자아의 특징 - 높은 휘발성).

이렇게 온라인에서 상대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간편하다. 과연 국회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인신공격을 했을 때, 나도 그에게 똑같이 인신공격으로 맞설 수 있을까? 검찰에 출두한 나를 향해 계란이 날아온다고 해서, 이럴 줄 알고 주머니에 꼭꼭 숨겨놨던 계란을 그에게 똑같이 던져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 상에서 역지사지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따라서 역지사지의 연결고리는 온라인 상에서만 무수히 발생하는 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역지사지의 연결고리는 우리에게 재앙적 결말을 선사할 뿐이고, 이것은 온라인 자아가 갖는 독특한 특성들의 종합적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온라인 자아와 반성적 의식

이렇게 온라인 자아라는 새로운 자아가 등장했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자아가 갖는 특징을 기존의 전통적 자아가 갖는 특징들과 비교해볼 수 있다. 우선 온라인 자아의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온라인 자아에서는 반성적 의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의식은 나에 맞서 출현하고, 외부 대상을 정립적으로 포착한 그 이후에 나에게로 향하며, 나와 다시 합류한다. 이렇게 나로부터 시작된 의식이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올 때에 구조적으로 반성적 의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온라인 자아에서는 이러한 반성적 의식이 불가능하다.

반성적 의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결국 온라인 자아(A*)가 아닌 나의 자아(A)로 그 의식이 되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는데, 이것은 의식이 뻗어 나아가는 과정들을 잘 살펴본다면 이해할 수 있다. A에서 출발한 의식은, A*를 거치며 온라인 세계를 향한다. 그러나 이렇게 온라인 세계를 향했던 의식은 A* 되돌아올 뿐, A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저 온라인 자아라는 허수아비를 의탁하여, 그 자아에 많은 책임을 떠넘길 뿐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세계에서 하는 비상식적 행위들은, 이곳이 온라인 세계이기 때문에 실제 세계에서 하지 못 하는 행동이나 말을 자유롭게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어 발생하는 결과이다. 이는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는 많은 책임을 져야만 하는 비상식적인 행위들을 온라인에서 저질러버린 뒤, 그것들을 단지 온라인 상에서 한 행위(A*의 행위)에만 머무르게 할 뿐, 실제의 자기(A)로 책임 돌리는 데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SSG 랜더스 갤러리에서는, SSG 랜더스의 감독을 아무리 욕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감독을 욕하는 글을 작성한 것은 SSG 랜더스 갤러리의 일원으로서 수행한 것이며, 이렇게 감독을 욕하는 일은 SSG 랜더스의 승리를 염원하는 SSG 랜더스 팬이라면 응당히 해야하는 일을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온라인에서 작성한 글에서 발생할 책임의 소지, 그 죄책감은 실제의 나(A)에게로 도달하지 않는다. 만약 랜더스 갤러리에서 활동 중인 내가(A*) 너무 수위 높은 욕을 했더라도, 이때 발생할 문제는 다른 회원들과 논쟁이 발생하는 것에 그치고, 아무리 일이 커지더라도 갤러리에서의 활동 정지 처분을 당하는 것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 나의 모든 책임은 온라인 자아(A*)가 책임지고, 실제로 나(A)의 안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랜더스 갤러리에 작성한 글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된다. 이렇게 나의 온라인 자아(A*)는 나의 모든 책임을 감당하는 허수아비가 되며, 따라서 실제의 나(A)로까지 이르는 반성적 의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즉 온라인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온라인 자아에서 의식의 자발성과 고유성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인간 실존의 구조에서, ‘라는 단일한 자아만이 존재하고, 이러한 나의 자아와 타자의 자아가 세계에서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또한 이렇게 라는 자아로부터 지향성을 갖는 의식이 끝없이 현재의 상태를 넘어 변화하는, 의식의 자발성역시 중요한 개념이다. 또한 이러한 의식의 자발성에 의해, 지향적 의식은 고유한 동시에, 초월적 자아는 시간이 흐르면서 끝없이 변화해갈 수 있는 측면을 지닌다. 이렇게 초월적 자아는 로부터 단일한 것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늘 지키고, 보존한 채로 그것을 바꾸며 변화시키는 인간의 실존 구조를 포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온라인 자아는 이렇게 초월적 자아처럼 고유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끝없이 변화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온라인 자아는 초월적 자아처럼 단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손쉽게 새로운 익명의 계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게 온라인 자아는 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될 수 있으며, 또한 는 언제든지 이러한 자아들을 내다버릴 수 있기 때문에 로부터 단일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많은 자아들을 더 이상 애지중지 유지하고 가꿔나갈 의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SSG 랜더스를 욕하는 내용을 게시하다가 계정이 정지 당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인생이 정지당한 것은 아니다. 나는 SSG 랜더스 갤러리에 다시 회원 가입을 하거나, 잠시 그것을 잊고 지내다가 정지가 풀렸을 때 돌아와서 활동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우리는 온라인 자아를 고쳐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에게 꼬리 내리며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을 택하는 대신, 가능한 끝까지 나를 위협하는 것들에 맞서다가 마지막 순간에 나의 자아를 놓아버릴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온라인 자아는 변화할 수도 없으며, 고유하지도 않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 자아에서 시선의 자유와 부끄러움의 소멸

사르트르는 타인과의 실존을, ‘지옥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투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의 소설 갇힌 방에서, 이러한 타자와의 투쟁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하나의 방에서 서로의 시선에 그대로 노출된다. 또한 타자가 나를 바라볼 때, 나의 세계는 완전히 제압되고, 와해되고, 도둑질 당하며 상대에 의해 완전히 즉자화되는 지옥 그자체이다.

온라인 자아 역시 타인들을 완전히 즉자화하여 바라본다.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들을 단순히 발정난 애들로 깔끔하게 요약해 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실 여부가 파악되지 않은 아주 단편적인 정보들을 마음대로 취사선택하고, 이러한 정보를 기반으로 타인을 완전히 즉자화하는 것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온라인 자아(A*)가 있어도, 우리(A)는 여전히 타인을 즉자화한다.

그러나 앞서 온라인 자아의 특성들을 생각해 본다면, 온라인 상의 타인이 나의 댓글을 통해 나(A)를 즉자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타인이 나를 즉자화할 때, 그의 행위는 나의 댓글을 통해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며, 내 댓글은 나의 온라인 자아가 낳은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를 통해 제아무리 타인이 나를 즉자화하려 시도해도 그가 나를 즉자화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허수아비인 온라인 자아(A*)일 뿐이고, (A)는 그 허수아비(A*)와는 다른 자아이다. , 우리(A)는 타인에 의해 절대로 즉자화되지 않으며, 즉자화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온라인 자아(A*)일 뿐이다.

즉자화와 시선의 문제를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온라인 자아가 있기에 타자와의 투쟁은 발생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온라인 자아만 있다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앞서 사르트르에 의하면 타인과의 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나의 시선이 상대를 향할 뿐 아니라, 상대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동시에 발생하며, 그 시선들이 무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내가 상대를 향하는 시선만이 존재할 뿐, 나를 향한 상대방의 시선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익명성 뒤에 숨어있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실제의 나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나의 온라인 자아만이 타인의 비방, 시선을 견딜 뿐인데, 이것은 나에게는 전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온라인 자아는 모든 부끄러움마저 소멸되어 버린다. 앞서 논의한대로 내가 한 행위들이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반성적 의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또한 익명성이 나를 든든하게 방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수행한 행위들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적은 댓글을 퇴고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는 아무의 눈초리도 받지 않는데 이렇게 자유로운 내가 굳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로써 나는 모든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렇게 시선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된 온라인 자아가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은, 기존에 현실 세계의 내가 타인과 소통했던 방식과는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시선과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된 나는, 소개팅 자리에서 11로 대화를 하는 것에도 몹시 쑥스러워하던 그런 나는, 이제 몇 만명이 볼지도 모르는 인터넷 기사에 내 의견을 당당하게 표출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게 된다. 이것은 비단 만 겪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떠오르는 모든 말을 온라인에서 내뱉을 수 있고, 거의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온라인 자아를 통해 생각해 볼 문제들

이렇게 나는 내가 생각했던 문제 의식, ‘어째서 온라인 상에서 이런 댓글들이 달리고 심지어는 지지를 얻는지에서 출발하여 어째서 이런 비상식적 현상들이 발생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현실과 온라인 세계의 차이가 있으며, 그렇다면 그 차이의 한가지 이유가 온라인 자아라는 것이 존재해서는 아닌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 특징은 무엇인지를 사르트르의 자아, 의식 개념들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나는 온라인 자아가 확실히 우리의 자아와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그 무언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나도 내가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온라인이 아수라의 장이 된 것은 인간 세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는 독립적인 온라인 자아라는 것이 있어서, 이 모든 결과는 그 온라인 자아라는 것들의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몹시도 독단적인 가정을 세우고 그것을 마구 지지하기만 하는 방식으로, 내가 믿고 싶은 것들을 정당화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작성하며 내가 해소하고 싶은 궁금증 중 다른 하나는, 과연 이러한 댓글을 다는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내가 옳은지, 분노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에 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분노하는 것이 옳다면, 나는 과연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나의 분노는 온라인 자아라는 것이 있든 없든 유효하다는 것, 그러나 댓글을 단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마냥 가능해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국 실제의 자아와는 구분되는 온라인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그 새로운 자아는 익명성과 낮은 책임이 전제되는 것이기에, 결국 실제의 자아와는 다른자아로도 볼 수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자아가 실제의 우리와 다른 인격체라면, 우리는 그것에 과도한 책임을 부여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는 법원에서 주취감형을 근거로 감형을 부여하는 여러 판례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주취감형을 인정하는 것은, 술에 몹시 취한 인격체를 평상시의 인격체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만약 온라인 자아와 실제 자아도 서로 다른, 심지어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관계일 수 있다면,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에 실제 세상에서와 동일한 잣대를 들이밀어 비판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온라인 자아와 우리의 자아가 독립적이라고 해도, 생각해 볼 문제들이 여럿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온라인 자아가 우리와 다른 것, 다른 의식, 다른 인격체, 다른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무관하게 온라인 자아들이 만들어낸 온라인 세계는 다시 우리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많은 의견들은 온라인 상에서 수렴하며, 이것들은 우리의 생각에 스며들거나, 정책에 반영되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실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온라인 자아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를 활용해 여러 현상들, 특히 사르트르 시절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현상들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온라인 정치 참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과거와 달리 직접 목숨을 걸고 시위에 나서거나,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학업을 포기하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과거의 정치 참여에 비하면, 유튜브의 구독, 좋아요, 알림설정, 댓글까지!’라는 구호를 통한 정치 참여는 왜인지 초라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전혀 초라하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앙가주망과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정치 참여의 형태를 온라인 앙가주망이라고 이름 짓고, 여기에 참여하는 우리는 온라인 자아라고 본다면, 생각해 볼 지점이 굉장히 다양하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의견을 제시함에 있어서 익명성과 낮은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이 더욱 좋은지, 나쁜지를 생각해보거나, 투표장에 가서 찍는 한표와 온라인에서 남기는 좋아요 하나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온라인 상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맺어지는지, 온라인 세계를 구성하는 온라인 자아들을 통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온라인 세계에서 관계는 비대칭적으로 발생하는 사례들이 많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는 타인과 대체로 11로 관계 맺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TV프로그램에 출연한 나에 대해 수 천개의 비방 댓글이 줄줄이 달리는 것은 상상만해도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인데, 이것의 원인은 나 혼자서 수 천명의 자아들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쉽게 발생하지 않는, 온라인 상에서만 발생하는 비대칭적인 관계의 한 사례이다. 이렇게 온라인 자아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많은 현상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 세계가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모든 원인이 우리 현실 세계가 그만큼 이상해졌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온라인에서의 자아는 현실 세계의 우리와는 매우 다르며, 타인과 이루는 세계의 구조도 다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문제점들이 자꾸만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국 온라인 세계 역시 별도의 준엄한 법과 제도를 따로 도입하여 구조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네이버의 스포츠연예란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아무도 댓글들을 달 수 없게 제한한 것, 또한 최근 통신매체음란법의 적용이 점점 더 확대 되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 구조적으로 대응한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온라인 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며,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인적 차원에서, 제도적 측면에서 노력해야할 것이다. 온라인 세계는 결국 현실을 사는 우리의 실존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발생한 참사보다 더 큰 참사를, 가면을 쓴 악마들을 보았다.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참고문헌 목록

 

세바스찬 가드너, 강경덕 옮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입문>, 서광사, 2019.

장 폴 사르트르,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옮김, <자아의 초월성>, 민음사, 2017.

장 폴 사르트르,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1. 장 폴 사르트르,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옮김, <자아의 초월성>, 민음사, 2017, pp.20-21. [본문으로]
  2. 익명성이 특징이 아닌 온라인 세계도 분명 존재한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는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을 더욱 드러내려는 듯한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SNS에서의 자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온라인 자아와는 명확히 다른 특징을 가지며, 온라인 자아보다는 우리의 실제 세계와 더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하지 않기로 하겠다. 예를 들어,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에게 '한 몫을 챙기려 한다, 나라를 구하다 죽었냐'는 글을 페이스북에 작성했던 김미나 창원시의원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유족들에게 즉시 고발된 사례가 있었다. 이를 통해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과 달리 페이스북에 쓴 글에 대해서만큼은 더욱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실제 세계와 비슷한 방식의 대응을 하며, 따라서 익명성이 없는 SNS의 자아익명성이 전제된 온라인 자아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