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과학철학을 공부하며 쓴 글이다.
'과학철학' 이라는 분야는 다루는 쟁점들이 정말 많은데, 그중 하나는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것들이다.
'조경' 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놀랐다. 어떤 학문을 수행함에 있어서 이렇게나 많은 방법들이 가능하다니... 내가 하는 것은 학문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조경을 하는 친구들은 모두 공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학철학을 공부하며 눌 품고 있던 생각은, 과학철학의 방법론 중에서 어떤 것이 조경의 방법론으로도 적합할지 생각하는 것이었다. 과학을 발전시켰던 그 방법론을 조경에도 가져온다면, 아니면 최소 나 혼자라도 그러한 방식으로 이 학문을 수행한다면, 내가 하는 학문 역시 지금보다 더욱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분야의 대가는 포퍼, 쿤, 라카토슈 등등... 굉장히 많다. 근데 그중에서 나는 파이어아벤트라는 학자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가 주로 주장하는 것은 무정부주의적 방법론인데, 내가 그동안 제도권의 교육에 너무 억압되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파이어아벤트가 주장하는 방식으로 조경이라는 학문을 개척해나간다면 참 많은 것들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파이어아벤트 글이 참 어렵고(파이어아벤트가 평생 관심 있었던 지식의 분야 과학, 수학, 철학, 미학 등등, 정말 너무너무 넓어서, 나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전문가급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엄청 탄탄한 논증 구조를 갖췄다기 보다 좀 오락가락하는 느낌이 강하다. 자기가 했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도 많이 했다고 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자 집단에서 '상대주의자' 라며 비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게 그쪽 업계에서는 거의 패드립에 준하는 칭호라고 한다. 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래서 논증의 구조를 좀 짜서, 파이어아벤트의 무정부주의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글을 써보았다.
이유는 그냥 파이어아벤트가 마음에 드니까!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 정말 어떠한 경우에도 좋다!]
-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이 갖는 의의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책 『방법에 반대한다』의 서문에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아나키즘적 영위이다. 즉 이론적인 아나키즘은 그것을 대신하는 법과 질서에 의한 여러 방법들보다도 인도주의적이고 또한 한층 더 확실하게 진보를 고무한다” 1라고 하며 과학의 방법으로 자신의 과학적 아나키즘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옹호하는 근거들은 기존 과학의 역사에서 발생했던 많은 진보의 순간들의 사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일부였던 갈릴레이의 사례를 주로 활용하여 설명하는 것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그 또한 그 스스로도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관점은 잘 계획된 일련의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우연한 만남에서 유발된 논증의 결과라고 소개하며 2 따라서 그의 과학적 아나키즘은 분명 매력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그가 소개한 예시와 주장만으로 그의 과학적 아나키즘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3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과학적 아나키즘의 방법론이 역사적으로 과학의 진보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으로 가장 우월하다기보다, 이러한 과학적 아나키즘이 앞으로의 과학적 발전을 위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하다는 점이다. 즉, 파이어아벤트가 과학의 방법론으로 과학적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의 빠른 진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학적 발전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과학적 진보의 규범적 측면에서 파이어아벤트의 방법론을 옹호할 것이다. 이를 개진하는 과정에서 쿤을 비판하는 파이어아벤트를 간략히 옹호하고, 파이어아벤트 그 스스로가 제시하지 않았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덧붙이며 결과적으로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이 ‘최소한 과학의 진보를 저해하지는 않는지’, 따라서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이 어째서 ‘어떠한 경우에도 좋은지’에 대해 밝힐 것이다.
- 쿤과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방법론
쿤에 의하면, 정상과학 내에서의 진보는 헌신적인 과학자들에 의해 매우 누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패러다임 내의 과학자들이 그 패러다임 내에서 연구를 더욱 깊게 수행하고, 더욱 미묘한 것에 주목하며 가능하다. 쿤은 특정한 규칙이나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만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하며, 그러한 전문가 집단인 과학자들은 정상과학 내의 실수 속에서 배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이어아벤트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정상과학 내의 실수 속에서만 배우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다면적이고, 우발적 사건과 중대한 국면, 사건들의 진기한 연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4, 과학 외의 영역에서 배울 수 있는 가능성, 그를 통해 과학이 진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게 된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의 대표적 양상인, 과학 외부에 서있는 비전문가의 유입이 어떻게 과학의 진보를 더욱 부추길 수 있는지를, 또한 적어도 과학의 진보를 늦추는 현상은 어째서 절대 발생하지 않는지를 논의하려 한다.
- 논증의 구조
이 글에서 밝힐 논증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전제 1)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은, 기존 과학의 인력 손실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어떠한 다른 방법론으로 과학이 진행 중이든, 그 방식으 로 진행 중인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지 않는다.
전제 2) 비전문가 집단은 심지어 과학의 진보를 부추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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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3) 따라서 파이어아벤트의 무엇이든 좋다는 방식은, 정말 어떠한 경우에도 좋다!
나는 파이어아벤트의 주장과 과학적 여러 논쟁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전제 1), 2)가 참임을 보이고, 따라서 결론 3) 역시 참이되는 타당한 논증을 제시할 것이다.
- 전제 1)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은, 기존 과학의 인력 손실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어떠한 다른 방법론으로 과학이 진행 중이든, 그 방식으로 진행 중인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지 않는다.
1-1) 비전문가 집단은 과학 전문가 집단의 인력 손실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기존의 과학의 전문가 집단에 소속된다고 생각되던 사람들은, (1)비전문가 집단이 제시하는 이론이 대응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고, (2)그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의 대상으로 여길 수도 있다.
만약 (1)의 상황이라면, 비전문가 집단은 기존의 과학 전문가 집단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기존의 과학 전문가 집단은 그들이 수행하던 방식으로 과학적 진보를 향해 나아갈 것이며, 따라서 과학 전문가 집단의 인력 손실은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상황은 (2)이다. 만약 과학 전문가 집단이 비전문가 집단이 주장하는 것을 너무 심각하게 고려하여 시간을 빼앗기는 등, 결과적으로 그들의 연구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작용한다면 이는 과학의 진보를 저해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이 비전문가 집단의 주장을 생각해봄직 한 것으로 고려했기 때문에 이것에 주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비전문가 집단의 주목은 필연적으로 비과학이 아니라, 쿤의 정상과학 체계 내에서 ‘변칙사례’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진보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상과학 내의 과학자가,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과학의 진보를 위해 생각해봄직하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렇게 비전문가 집단의 의견에 반박하기 위해 전문가 집단의 과학자들이 헌신하는 경우가 어째서 과학의 진보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2-1)에 이어서 보이도록 하겠다.
1-2) 비전문가 집단의 과학 전문가 집단으로의 이동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비전문가 집단의 노력을 과학 전문가 집단으로 전향시킨다면,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전문가 집단에 속하는 과학자의 수가 늘어난다면 과학의 진보가 촉진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비전문가가 과학의 전문가로 전향하는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진화심리학자와 진화생물학자 간에 발생했던 논쟁의 역사는, 진화심리학자가 진화생물학자로 전향하거나, 반대로 진화생물학자가 진화심리학자로 전향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5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며 상대의 주장에 반박하려고 했을 뿐이다. 한의사와 의사의 논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의견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자신의 입장을 전향하는 일, 예를 들어 비전문가 집단에서 전문가 집단으로 이동하여 기존의 관점을 모두 부정하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진화심리학자 집단은 과학의 진보를 위해, 전문가 집단으로 전향하는 것을 결심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이는 2)에서 전체적으로 다룰 내용인데, 그 이유를 요약하자면, 결과적으로 비과학과 과학의 구분은 동시대의 관점에서 어려울 수 있으며, 만약 진화심리학이 비과학이라고 하더라도 과학적 진보에 이바지해온 측면이 있으며, 또한 파이어아벤트가 주장했듯 과학의 다면성, 사건들의 진기한 연결, 상호관계의 미궁에 의해 과학적 진보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열려있기 때문이다.
- 전제 2) 비전문가 집단은 심지어 과학의 진보를 부추기기도 한다.
2-1) 비전문가를 반박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헌신의 결과로 과학이 진보한다.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저서 『방법에 반대한다』에서, 논리적 결함을 가진 이론을 제안하고 그것의 도움으로 재미있는 결과를 획득하는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일부러 역설적인 제안을 한 후, 그것의 오류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우리의 지식이 확장될 수 있음을 밝히는 사례들이다. 6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전문가 집단이 스스로 놀이처럼 제시한 역설적 제안 뿐만 아니라, 비전문가 집단이 제시한 일견 얼토당토 않아 보이는 제안까지도 과학적 진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우선 과학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행위를 하는 비과학 집단은, 과학에 대해 비전문가로 인식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비전문가 집단이 오히려 난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한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아마도, 많은 경우에 이는 그저 무시의 대상이 되거나(이 경우 앞서 1-1)의 (1)에 해당), 혹은 그들이 어째서 틀렸는지 적극적으로 입증하려 들 것이다(이 경우 앞서 1-1)의 (2)에 해당). 나는 이들의 오류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진보가 발생했으며,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발생한 진보의 구체적 사례는 ‘진화심리학’과 이를 비판하기 위한 전통적인 ‘진화생물학’의 논쟁을 통해 알 수 있다.
심리학과 과학의 경계에 있었던 ‘사회생물학 논쟁’이 발생한 이후, 인지주의와 진화론을 결합한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오늘날 진화심리학은 현재 비과학으로 보는 시각이 주류이며, 따라서 전통 과학의 전문가 집단에게 늘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정통적으로 과학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생물학, 그리고 뇌과학자들이 잘 설명할 수 없는 많은 현상들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이 오히려 척척 답을 더 잘 내놓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많은 전문가들은 진화심리학을 무시하거나, 혹은 그들이 내놓은 이론이 어째서 틀렸는지 입증하려 들 것이다. 이렇게 진화심리학의 오류를 보이며 비판한 인물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가장 대표적이다.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자신의 여러 글에서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을 비판했다. 굴드가 공격하는 진화심리학의 문제는, 그 이론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적응’이라는 법칙을 통해 자신들의 이론을 설명한다는, ‘적응 만능주의(adaptationism)’에 대한 비판 7이다. 나는 이렇게 진화심리학자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이론인 ‘적응’으로 귀결시킨다는 것, 또한 ‘적응’이라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한 주장은 명백히 반증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이론을 수정해나가는 규약주의자들의 책략과 진화심리학자들의 전략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때문에 이는 전통적인 과학자 집단에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굴드 역시 진화심리학에 대해 비판을 가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러한 비판의 결과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굴드가 진화심리학을 비판하는 내용, 자신이 진화생물학자로서 주장하는 그 논변은 단순히 상대 진영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입증하는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진화심리학을 반박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그들의 논증을 비판하며, 그 이론보다 자신의 진화생물학이 더욱 나은 이론임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경우 결과적으로 진화심리학 역시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즉, 비전문가에 의한 반동으로 과학의 진보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전문가에 의한 진보는, 쿤의 정상과학 하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쿤의 정상과학 하에서는 과학자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관과 목표가 중요하며, 그들에게는 규약주의자의 책략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적응 만능주의적 논증은 정상과학 내에서 수행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진화심리학자들이 척척 답을 내놓는 생물학적 현상들이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변칙사례에 해당하지도 않기 때문에, 진화심리학자들의 의견은 단순히 묵살되고 말 것이다.
2-2) 비전문가를 비전문가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만약 비전문가의 행위를 제한하고, 그들의 행위를 규제하고 박해했는데, 후대에 들어 이러한 비전문가들이 사실은 과학의 전문가, 심지어는 선지자임이 밝혀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러한 제한들은 과학적 진보를 명확히 방해한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과학의 진보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둘의 구분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며, 이는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쿤과 파이어아벤트의 의견을 나눠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또한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따라서 비전문가와 전문가를 현 시점에서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비과학이라는 평가는 동시대에 규정된다기보다, 논의가 계속 이어지다 후대에 들어야 명확히 평가(지금에 와서야 점성술이 명확히 비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 과학의 비전문가 집단들이, 과연 절대 불변하는 비전문가 집단이라고 명확히 규정할 근거가 과연 있기야 한가? 의문이 생긴다.
파이어아벤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과거에 과학이 아니라고 판정되어 추방되었던 많은 이론들은, 사실 그 진가를 나타낼 기회를 얻기 훨씬 전에 포기되고 보다 시류에 적합한 설명에 의해 대치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 예시로 몇 가지 신화의 과학적 내용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원시적인’ 신화들이 이상해보이거나 턱없어 보이는 것은, 단지 그것의 과학적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가장 단순한 물리학적⋅의학적 혹은 천문학적 지식에도 익숙지 못한 문헌학자나 인류학자에 의해 왜곡되기 때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많은 신화들의 외견상 원시성은 단지 그 수집가나 번역자의 천문학, 생물학 등의 원시적인 지식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며, 많은 학자들의 발견 이후로 학교, 천문대, 과학적 전통 및 지극히 흥미로운 이론들을 만들어 낸 국제적인 ‘구석기 천문학’의 존재를 우리들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8이는 우리가 ‘동시대’에 과학과 비과학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으며, 비과학이라 여겨지던 것도 후대에 들어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를 재검토하면서 그것이 가졌던 의미를 뒤늦게 파악할 수 있을 뿐, 동시대에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비단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 뿐 아니라, 어떠한 발견이 진보적 발견인지 얼토당토 않은 이론인지를 구분하는 것 역시 동시대의 잣대로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보인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중심설이 그러한 사례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과학적 행위를 막거나 저해하는 것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학적 아나키즘은 또한 힘을 얻는다. 우리는 동시대의 시류에서 ‘약간’ 앞선 것은 명확히 진보라고 파악할 수 있으나, ‘너무’ 급진적인 이론,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같은 이론은 동시대인으로서 진보적 이론인지, 혹은 이론으로서 가치가 전혀 없는 사이비 이론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비전문가 집단과 전문가 집단을 동시대에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한 사례를 제시하고, 동시대에 비전문가라고 인식되는 집단임에도 동시대의 과학적 진보에 이바지하는 실제의 사례를 보이도록 하겠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의사-한의사들의 논쟁’이 그것이다.
우선 의사라는 직업은, 과학, 특히 생물학의 이론들을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영역에서 다루는 전문가 집단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의사를 아주 전문적인 집단으로 인식하며, 그들이 또한 생물학에 꽤 정통한 전문가 집단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의사 집단이 자신들과 같은 부류로 엮이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사들은 한의사는 의사가 아니라 무당, 혹은 동의보감을 배우는 동양철학자 정도로 취급하는 듯하며, 한의사는 그렇게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기지 않아 해묵은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한의사 집단에서 주로 내놓는 반박의 요지는, ‘우리의 신체라는 것은 부위별로 명확히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이며, 또한 이 유기체의 작동 원리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아직 명확히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을 뿐 실제로는 한의학에서의 침술과 뜸, 한약 등의 행위를 통한 치료가 큰 효과가 있다’는 식의 주장이며, 원인이 아직 명백히 드러나지 않은 현상을 기반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과연 그들이 무당이라고, 즉, 과학과는 무관한 비전문가 집단이라고 이 시점에서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9 이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충돌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의학에서 비전문가 집단인지 전문가 집단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분명히 의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10, 만약 그들이 의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기존의 의학(양방)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2-3) 비전문가가 비전문가라고 밝혀지더라도, 우리는 모두 과학의 진보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사례는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영역을 동시대의 관점에서 명확히 구분하는 것에 난점이 있으며, 비전문가인지 아닌지 모르는 집단에 의해서 과학의 진보 역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전문가-비전문가 구분의 문제인, 의사와 한의사의 논쟁을 소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전문가 집단인지 아닌지 명확히 말할 수 없는 한의학이 의학의 발전에도 분명 이바지했으며 앞으로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11 과학의 발전이 의학의 발전과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12 따라서, 비전문가로 판명되더라도 그들이 과학의 진보에 기여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이에 더불어서 모든 과학의 비전문가 집단이, 앞으로 과학의 진보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역시 주장하고 싶다. 이는 파이어아벤트가 주장하는, 과학의 ‘다면적이고, 우발적 사건과 중대한 국면, 사건들의 진기한 연결’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13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과학적 진보에 이바지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과학의 발전에 절대 이바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보다 구체적인 사례로,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유전자를 기존의 방식보다 8~10배 빠르게 해석하는 방식이 유전자 지도의 초시가 된 사례가 있다. 과연 50년 전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과연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오늘날의 DNA의 염기서열을 빠르게 해독하는 데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과학에 이바지하지 않는다고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과학의 진보로 귀결될 필요는 없지만, 다만 그 자신의 영역에서 진보(예를 들어 컴퓨터 알고리즘의 발전)가 과학에서의 진보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과학에 이바지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통해,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아나키즘의 지니는 의의를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1)과 2)의 결과로, 다음의 결론이 도출된다.
- 결론 3) 따라서 파이어아벤트의 무엇이든 좋다는 방식은, 정말 어떠한 경우에도 좋다!
과학적 아나키즘은 과학적 진보를 이끌 수 있으며 최소한 진보를 늦추거나 퇴보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역으로 과학이 아닌 것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은 유효하다.
참고문헌 목록
P. Feyerabend, 정병훈 역, 『방법에 반대한다』, 그린비, 2019.
P. Godfrey Smith, 한상기 역, 『이론과 실재』, 서광사, 2014.
S.J. Gould⋅R.C. Lewontin, 「The spandrels of San Marco and the Panglossian paradigm: a critique of the adaptationist programm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B, VOL. 205, NO. 1161, 1979.
김춘호, 「한⋅양방 의료진들, 근거기반 소통으로 성과 구체화 시켰다」, 민족의학신문, 2019.07.18. (출처: https://www.mjmedi.com/news/articleView.html?idxno=37045)
김준래, 「첨단의학으로 진화하는 전통의학의 산실」, The Science Times, 2020.12.02. (출처: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B2%A8%EB%8B%A8%EC%9D%98%ED%95%99%EC%9C%BC%EB%A1%9C-%EC%A7%84%ED%99%94%ED%95%98%EB%8A%94-%EC%A0%84%ED%86%B5%EC%9D%98%ED%95%99%EC%9D%98-%EC%82%B0%EC%8B%A4/)
이찬규⋅이나미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나타난 자연주의와 근대성의 기원 연구」, 의사학 제 22권 제1호(통권 제 43호), 대한의사학회, 2013.
- P. Feyerabend, 정병훈 역, 『방법에 반대한다』, 그린비, 2019, p.53. [본문으로]
- 같은 책, p.455. [본문으로]
- 어쩌면 이 책은 과학의 방법론으로 과학적 아나키즘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아나키즘’을 설득하기 위해 ‘과학’을 끌어들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본문으로]
- 같은 책, p.54. [본문으로]
- 나는 논쟁의 소지가 있지만, 과학의 비전문가 집단의 두 예시로 ‘진화심리학자 집단’과 ‘한의사 집단’을 예시로 들어 설명할 것이다. 또한 이에 대응하는 전문가 집단은 ‘진화생물학자’와 ‘의사(양방, 양의사) 집단’이다. [본문으로]
- 이분의 초기 형태인 결과, 선은 점으로 이루어지고, 면은 선으로 이루어지며, 입체는 면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기하학의 결과, 오래된 양자이론의 예측, 복사현상에 대한 양자이론 초기 형태의 예측 등을 예시로 들고 있다. (같은책, p.62.) [본문으로]
- S.J. Gould⋅R.C. Lewontin, 「The spandrels of San Marco and the Panglossian paradigm: a critique of the adaptationist programm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B, VOL. 205, NO. 1161, 1979. [본문으로]
- P. Feyerabend, 같은 책, pp.95-98. [본문으로]
- 이러한 논쟁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한의원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의사가 무당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한의사 집단이 양심을 상실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한의학의 의학적 효력이 없음에도 그 사실을 숨기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이는 물론 논쟁의 소지가 있는 주장이다. 많은 한의사들은 자신들이 양의학을 통해 발전하며, 또한 한의학의 연구가 양의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2020년 12월 2일 한국과학창의재단에 기고된 기사 ‘첨단의학으로 진화하는 전통의학의 산실’을 통해 설명하자면, 이 기사에서는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한의학과 첨단 과학을 융합하여 개발한 의료적 장비를 소개하고 있으며, 한⋅양방 통합의료 연구 활성화를 주장하며 통해 양의학으로부터 한의학으로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주장은 한의사 집단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2019년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의해 개최된 ‘의⋅한 협진 시범사업 우수사례’로 선정된 여러 사례들을 통해, 양방에서도 한의학과의 협진이 의학의 난점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다시 앞서 한국과학창의재단에 기고된 기사를 통해 설명하자면, 이 기사에서는 한⋅양방 통합의료 연구 활성화 뿐 아니라, 의학의 발전을 위해 “한의학이 주도하는 새로운 융합의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해오던 연구 방식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으며, 같은 방식으로 한⋅양방 통합 의료 연구가 더욱 활성화 된다면, 미래에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의학적 진보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예를 들어 MRI나 CT는 물리학과 기계공학의 산물이며, 내시경은 광섬유의 합성을 통해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실험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합되어 상호간에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심지어 파이어아벤트는 『방법에 반대한다』 제4장에서, “관념치고 우리들의 지식을 개선시킬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 사상사 전체는 과학에 흡수되고 이론을 개량시키는 데 이용된다”고 까지 주장한다. (같은 책, p.6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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