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체주의 건축의 해체, 이종건, 발언, 1999> 중 '해체주의건축은 논할 수 있는 것인가?'읽기 (pp. 28-40.)
앞서 글에서 잠시 살펴봤던 이종건 건축 비평가, 전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가 쓴 글이다.
앞서 읽었던 <건축텍토닉과 기술 니힐리즘>이 이종건 비평가가 번역한 글이었다. (정말 정말 읽기 힘들었던 글)
https://kimgyusoon.tistory.com/58
[공간디자인 컨셉스터디] <건축텍토닉과 기술 니힐리즘, GEVORK HARTOONNIAN(이종건 역), SpaceTime, 2008>
1. Gevork Hartoonian 처음들어보는 저자이고,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라 검색해도 잘 안나온다. 건축가는 아니고, 캔버라 대학교에서 건축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https://researchprofiles.canberra.edu.a
kimgyusoon.tistory.com
이번에는 그가 직접 쓴, <해체주의 건축의 해체> 중 서두 부분인 '해체주의건축은 논할 수 있는 것인가?' 를 짧게 읽는다.
사실 해체주의 잘 모른다. 조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평가받는, 나름 입지전적 인물인 베르나르 츄미의 라빌레뜨 공원이 해체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도 보았었고... 그리고 사실 익숙하게 들어본 용어이기도 하여 책 전부를 읽었다면 해체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많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최근 너무나도 시간이 부족하였기에...
짧은 글이라 딱히 요약할 것은 없고, 중요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적어놓는다.
'해체주의 건축'의 논의에서 가장 긴박한 문제는 '해체주의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p.28)
해체주의 건축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을 묻는 물음, 즉 해체주의 건축의 정의의 가능성은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우선 해체주의 실행자들은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정의부여나 개념한정 작업, 그 자체를 파기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p.30)
해체주의 건축의 논의의 가능성을 해치는 이러한 문제들은 다음의 논리로 별 무리 없이 풀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문제, 즉 '엄격한 정의의 불가능성'은 차라리 '엄격하지 않게' 함으로써 정당성과 함께 유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적어도 철학에서 니체 F. Nietzsche 이후, 그리고 예술사에서 세잔느P. Cezanne 이후의 골격을 이루는 주장들은, 대개 칸트I. Kant가 제시한 정신성이나 의식성의 구분에 대한 공격을 중요한 바탕 혹은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그리고 미학적 직관은 피차 구분될 수 없이 서로 엉겨 있다는 것이다. 혹은 달리 표현해서, 예술과 비예술(혹은 일상)은 구분할 수 없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 칸트가 유별나게 우리의 정신성의 작용들을 범주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면, 반칸트 집단은 지나치게 구분의 불가능을 내세워, 개체적 속성이나 현상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주의 엄격성의 결여를 근거로, 개개의 이념이나 현상의 자율성을 흐리멍덩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 또한 지나치게 소박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책상 앞의 커피잔이 던지는 그림자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의 경계가 엄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것과 구별되지 않다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음과 같은 이치다.
(...) 그러므로 비트켄쉬타인의 '엄격한 정의의 불가능성'은 해체주의 건축의 논의 가능성을 무효화시킨다기보다는, 논의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직된 개념의 지나친 추상화, 범주화, 고정화를 경고하는 경구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pp.32-34)
'해체주의 건축' 이라는 용어를 물적 차원이 아닌 정신성의 영역으로, 따라서 등장되고 논의되는 물物로서의 건축은 오직 그것을 드러내고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데 의의가 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이런 시각에서 '해체주의 정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있었고 또 있는, 어떤 정신성의 한 측면이라는 점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p.39)
그러니까 '해체주의 정신'은 사물을 '비평적으로' 보는 시각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보편적으로 깔려 있다. 단지 오늘날 '해체주의'라고 하는 어떤 형태의 정신성을 무대에 올려 논의의 주제로 삼는 것은, 그것이 더 확장되고 극화되어 있음을뜻할 따름이다. (pp.39-40)
2. 읽고나서 든 생각 - 두 가지 의문과 한 가지 경고
해체주의의 정신이 그 용어의 등장 이전부터 보편적으로 존재해오던 것이나, 이렇게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그것이 해당 시대에 접어들어 더욱 확장되고 극화되어 있음을 뜻할 따름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해당 텍스트를 읽고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뿐 아니라, 그 이전과 현재를 모두 가로지르며 미래에도 확실히 존재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공통의 정신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을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어떻게 지속적으로 변화하면서도 절대 잃지 않는 역설적인 정신성을 지닐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앞서 모더니즘 건축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살펴보며 느낀 공통점은, 기존의 것을 벗어나려는 아방가르드적 움직임에 의해 그 흐름들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앞서 필자가 ‘조경 모더니즘은 없었다’라고 주장했던 것도, 다시 생각해보면 아방가르드적 움직임이 부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특징인 전위성은 그 둘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건축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분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분리 가능하다고 전제하여 아무리 끊어놓으려 하여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승되는 공통된 정신성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이런 시대적 흐름을 기념일 정하듯 딱딱 구분하며 엄정히 구분할 필요는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런 것들을 엄정히 가려놓아도 되지 않는 것 아닐까? 따라서 이것들을 엄정히 구분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심지어 범주화하여 공통적 특징을 규정지으려는 모든 시도들이 가능하기는 한 것이기는 한지 의문이 든다.
두 번째 의문은, ‘용어의 부재로 미처 정립되지 못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는 것이다. 기표의 부재로 우리가 인지의 영역으로 불러내지 못하는 기의들이 과연 존재하고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현시대에 존재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 나중에 이즘화 덧붙여져서 재정의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나는대로 적고나서 깨달은 것은, 필자가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은 앞서 살펴본 '해체주의건축은 논할 수 있는 것인가?' 챕터 바로 뒤에 이어 나오는 '건축에서 물적 현상과 정신성에 대하여'의 서두에 나오는 이종건의 의견과는 정반대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이종건은 이렇게 말한다
물적 현상으로서의 건축을 어떠한 시대가 안고 있는 정신성의 프로젝트로 보면서, 나는 한 시각을 필히 그리고 우선적으로 경계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전자와 후자를 인과적으로 엮는 시각이다. 특정의 건축을, 그것이 아방가르드적이든 혹은 범상하든, 특수한 시대와 지역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 혹은 체계의 반영이나 산물로 풀이하는, 그러한 인과적 시각은 건축의 창조적 실천 행위를 납작하게 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p.40 후반부)
아무튼 필자는 푸는 글 까지만(p.40 중반부까지)을 읽고 든 생각을 썼는데 이것이 이종건에 의하면 '우선적으로 경계해야할 것'에 해당하여 당황스러웠다.
앞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종건의 의견에 설득될지, 여전히 반대할지 모르겠으나 일단 읽은 지점까지 드는 생각을 적어본다. 뒷 내용을 읽지 않고 쓴다는 것이 위험하지만 재밌기도 하니까. 일단 싸지르고 나중에 책 전체를 읽어보면 깨달음이 있을 것 같다. 뭐 그리고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종건의 해체주의 건축을 통한 새로운 반성과 발견을 긍정하는 동시에, 한 가지 짧은 염려를 표한다.
저자의 말처럼 해체주의 정신은 사물을 비평적으로 보는 시각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보편적으로 깔려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감하지만, 그것이 ‘해체주의’라는 용어로서 논의의 주제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은 그 과정에서 ‘분명한 변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며, 그 변화는 분명히 이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 ‘분명한 변화’는 기존의 인간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 수 있으며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허나 저자는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결과로서 존재하는 정신성만을 언급하며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다고만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변화의 양상과 과정의 중요한 지점을 놓친 채 환원주의적으로 모든 것을 단지 치환해버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하면 최근 AI가 주도하는 기술과 인간의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의 시대를 가령 ‘AI즘’이라고 명명한다면, 이 AI즘이라는 것은 인류의 그 어떤 과거를 들춰보아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임이 자명하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 정신성의 확장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AI가 만드는 현시대의 변화 역시,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하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였고, 이 모든 것들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심지어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하드웨어 기술의 발달, 그리고 딥러닝의 방법론은 수백만년간 인간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을 단지 십수년만에 가능케 했다.
이처럼 기술의 발달과 인간 사유의 한계치는 항상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항상 확장하는 쪽으로 진행된다. 즉, 인간 사유는 항상 확장되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새로운 정신, 그리고 시대정신을 낳게 된다.
그렇지만 만약 이 ‘AI즘’의 발생 과정, 그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변화를 포착하지 않은 채, AI즘이 지향하는 정신성의 근원은 인간의 모든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해왔던 호기심이라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그 본질은 늘 존재하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환원주의적 편향에 빠져 내린 성급한 결론임이 분명하다.
새롭게 담론의 대상이 되는 시대 정신의 본질은 인류의 보편적 역사에서 발굴할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새로운 정신성이 발생한 과정과 원인 등은 기존의 것으로 범주화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것일 가능성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